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부총장)
지난 7월 12일 오전 10시30분, 부산남구 대연동의 유엔기념공원에서 조촐한 기념행사가 거행되었다. 위크컴 희망재단 관계자들, 그리고 이 모임을 관장한 위트컴장군 추모사업회 사무총장이신 부산대학교 김재호 교수 등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부산시민에게 보편적 인류애와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했던 위트컴 장군의 61주기를 기념하는 모임이었다. 비록 참석인원은 40여명에 불과했으나 뜻 깊은 모임이었다. 필자는 추모행사에 앞서 1부 예배 인도를 부탁받고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고, 오랜 세월 잊혀져 왔던 한 이국인을 생각하게 되었다.
위트컴 장군(Richard S. Whitcomb, 1894-1982)은 1953년과 1954년 부산미군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재임했던 육군 준장이었다. 그는 짧은 기간 부산에서 근무했으나 전쟁이 앗아간 폐허위에서 고달픈 삶을 이어가던 부산시민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던 이국인이었다. 1946년 9월 개교한 부산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으나 대학 부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장군은 금정산 기슬의 50만평의 부지를 확보하도록 도움을 주었고, 25만불 상당의 건축 자제까지 제공했다. 그리고는 예하 공병부대를 동원하여 온천장에서 금정산 기슭의 대학 입구까지 1.6km의 진입로를 건설하여 교육사업을 지원했다. 1950년 4월 개원한 중구 대청동의 메리놀병원이 전후 급증하는 환자들을 치료할 수 없었을 때 이를 애석히 여겨 대한미순원조처(AFAK)를 통해 병원신축을 지원한 이도 위트컴 장군이었다. 도움을 받은 의료 시설은 메리놀 병원만이 아니었다.
1953년 11월 27일 저녁 8시 30분경, 예기치 못한 ‘부산역전 대화제’가 발생했을 때도 그는 사랑을 베풀었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 화제로 6천 세대 약 3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화재 발생 지역은 영주동 피난민 인구 밀집 지역이었고, 피해 지역은 영주동, 동광동, 중앙동 일대였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가난한 서민들은 다시 추위에 싸우며 일용할 양식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이때도 장군은 거대한 천막촌을 짓고 군수물자를 제공하며 이재민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베풀었다. 당시 부산인구가 82만명인데, 재난 인구는 약 3.8%에 해당했다. 부산역 중심의 화재 지역이 피난민 중심의 인구 밀집 지역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재해지역의 인구는 전체 부산인구의 20%를 상회했다. 이들에게 온정을 베풀었고, 천막촌에도 학교와 교회를 세워주고, 영도에는 산원(産院, 조산소)를 설치하여 편안한 출산을 도와주었다. 도움을 받았던 전재민들은 위트컴 장군을 기리며 이런 돌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기념글월, 윗트컴 장군은 우리들 화재민을 위하야 이곳에 학교 산원 교회를 짓도록 후원하여 주었다. 우리들은 영원히 그 공적을 찬양하는 바이다. 단기 4287년 11월 25일.” 위트컴 장군은 부산 시민을 돕는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한복을 입고 거리를 누비며 모금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위트컴 장군의 사랑과 선행, 그 거룩한 열정은 어디서 왔을까? 물론 인도주의적 측면이 없지 않았겠지만 사실은 그의 한국사랑은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고, 조부는 장로교 목사였다.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전쟁이 끝난 황폐한 피난민의 도시 부산에서 사랑과 선행으로 꽃을 피웠던 것이다. 위크컴 장군은 퇴역한 후에도 한국에 남아 전쟁고아들을 보살폈다. 한국에 살던 그는 1982년 7월 12일, 88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의 유해는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사랑이 모든 것을 덮고, 사랑의 법이 최상의 법이라고 믿었던 장군이었다. 이런 공적에도 불구하고 위트컴 장군의 행적은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추모예배에서는 나는 야고보서 1장 26-28절을 읽고, 진정한 종교, 진정한 신앙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고 말했다. 한 가지는 이타적 성격이고 다른 한 가지는 이 세상의 가치와 다른 초월적 가치라고 설교했다. 위트컴 장군이야 말로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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