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부총장)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히브리어 시험에 낙방하여 재시험을 친 일이 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군복무를 마치고 복교한 얼마 후였기에 워밍업이 안된 탓이었다. 그래도 늘 기억에 남아 있는 흥미로운 말이 ‘라손 하라’라는 히브리어였다. ‘라손’이 혀라는 뜻이고 ‘하’는 관사, ‘라’는 ‘나쁜’ 이란 뜻이니 직접적으로 ‘그 나쁜 혀’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포괄적으로 “타인에 대하여 하지 말아야 할 말”으로 사용된다. 다른 사람을 욕하거나 깍아 내리는 언사를 삼가라는 의미의 이 단어는 늘 내 마음에 남아 있다. 남에 대해서는 좋게 말해야 한다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나도 남을 욕하거나 험담한 일이 적지 않았으니 나도 ‘라손 하라’와 작별하지 못했다.
살다보면 남(他)에 대해 과도하게 비방하거나 끊임없이 험담하며 깍아내리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어느 사회에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 같다. 17세기 프랑스의 파스칼은 “만일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 안다면, 세상에는 단 몇 명의 친구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헐뜯는 사언(詐言)에는 친구도 없다는 말이다. 옥한흠 목사는 남 헐뜯은 일을 사명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라손 하라’는 교회 공동체에도 건재한 것이 분명하다. 남을 욕하고 비난하고 험담하는 일련의 부정적 공격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한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위로 하나님을 경외 할 뿐만 아니라, 아래로 동료 인간을 사랑하며 사는 상부적(相扶的) 존재로 창조하셨다. 한자의 사람 인(人)자도 서로 기대어 사는 상부적 실존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남을 욕하고 비난하고 험담하고 공격하고, 심지어는 한 사람이 기대고 서 있는 지신(持身)의 마지막 한 토막마져 무너뜨려야 직성이 풀리니 이 무슨 현실인가?
남을 비방하는 데에는 몇 가지 심리적 동기가 있다고 한다. 첫째가 경쟁적 동기라고 한다. 경쟁자를 나쁜 인간으로 몰아 도덕적으로 무력화시킴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시탐탐 비방거리를 물색하고 건수가 생기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필요하면 동조세력을 동원하기도 한다. 경쟁자를 끌어내려야 내가 높아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현상을 고신대학교 김동인 교수는 ‘물침대 효과’라고 불렀다. 남을 짓누르면 그만큼 내가 높아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쟁적 동기의 이면에는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다. 우등감이 있다면 경쟁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에 상대를 헐뜯을 필요가 없게 된다. 남을 비방하는 것은 결국 나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부각시켜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려는 심리라고 한다. 그래서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이를 공표하는 일을 정의로운 행위로 포장한다. 확인되지 않는 소문을 사실화 하기도 한다. 유대인들은 이런 행위를 모치 쉠 라(motzi shem ra)라고 불렀다. 어자적으로 ‘퍼뜨리기’인데, 다른 사람 깍아내리기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부도덕한 죄악으로 간주했다. 명예훼손과 중상 모략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남을 헐뜯는 세 번째 동기는 자기 존재감의 표현이라고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소유, 권력, 명예에의 욕망이 있는데, ‘나도 여기 있소,’라는 존재감의 과시라고 한다. 그래서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것, 곧 ‘라손 하라’ 는 상대가 쓰러진 폐허 위에 자신의 누각을 세우려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회만 주어지면 무덕(無德)의 난도(亂刀) 휘둘으며 자상(刺傷)을 일삼고, 심리적 살인에 이르기까지 한다. 무엇이 인간 사회를 전장으로 만드는가? 한 가지, 자기 욕망 때문이다. 백년도 못사는 인생인데, 남 욕하고 일어선들 무슨 선한 것이 있을까? 자기 욕망에 대한 집착이 클수록 우리의 영혼은 황폐화되고 만다. 영혼의 자유함이 없는데 무슨 평안이 있겠는가? 남을 향한 날카로운 칼날은 자기 마음의 표현(눅6:45)이기에 ‘라손 하라’와 절교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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