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 목사의 눈물
18일 부산노회에서 최덕성 교수의 진정권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펼쳐지던 중 고신증경총회장이며 부산노회 최고 원로인 조긍천 목사가 발언권을 얻어 마이크를 잡았다. 조긍천 목사는 “모 신문에 실린 내용입니다”며 지난번 고신포럼에서 김영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글을 신문에서 오려와 읽어 내려갔다. 조 목사는 “자유주의 신학과 전통주의 신학의 가시적인 차이점은 회개입니다. 고신교단은 신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교회의 쇄신을 도모하고 갈구하는 회개운동에서 배제되었으므로 그러한 역사적인 의의를 인식하고 교회의 쇄신과 회개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때 고신의 정체성을 자타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읽으며 “우리 신학교가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며 눈물을 흘렸다.
조긍천 목사는 “정말 장로님들께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다른 학교도 아닌 우리 신학교에서....”며 말을 잇지 못하다가 “금번 60주년 행사는 회개운동으로 전개해야 합니다. 신대원에서부터 진정한 회개운동이 시작될 때 우리교단이 주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해 주변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Y이사장 최단기 사임설
지난 20일 부산 YMCA 이사장 이취임식이 있었다. 취임식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겠다고 공언한 부산 Y이사장 최찬기 장로는 한나라당 공천을 받고 동래구청장 출마로 인해 취임이래 최단기 자동사임이 될 수밖에 없어 Y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길 예정이다. 부산 YMCA 임동규 사무총장은 이번일을 놓고 “고의는 아니다”고 답했지만, 동래구청장에 출마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Y이사장에 취임한 것이 아니냐는 따가운 시선을 피할수는 없을 것 같다.
부산 Y가 이사 보선에 정치인들을 영입하더니 이제는 이사장이 직접 정계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든다고...
장로부노회장 감투가 뭐길래
합동 남부산노회 임원선거가 예정된 한 시간 넘게 진행되면서 갑론을박하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장로부노회장 선거에서 유효득표수 201표 중 양원 장로가 101표, 조병옥 장로가 97표를 얻으면서 시작됐다. 장로부노회장으로 선출되려면 과반수를 넘어야 하는데 과반수가 101표냐 102표이냐를 두고 논쟁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후 남부산노회에서 부정 투표가 있었다는 발언이 나오면서 장내가 소란스러워졌고 이에 발끈한 남부산교회 당회가 그런 일이 없다고 항의하자 다른 교회에서 부정투표를 했다고 정정하는등 그야말로 임원선거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과반수 논란에서 부정 투표 논란으로 이어지자 재투표에 들어갔고 결국 조 장로가 106표를 얻어 박빙의 승부에 도장을 찍었다.
이렇게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 했으나 회의록 채택 시간에 서기가 투표용지를 버리려 하다 1차 투표를 재검해 보니 조 장로 표가 양 장로보다 더 나왔다고 양심선언적 발언한 것.... 한 두 표 차이가 아니었기에 일부에서는 누군가 중간에서 장난을 친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솔솔 흘러 나오고 있다. 감투가 좋은 것이긴 하나 하늘나라 감투 보다 더 탐이 났을까... 앞으로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 할 노릇.
이금조 목사건 ‘기각’
모 여성도가 돈을 빌려 갚지 않았고, 성추행까지 했다고 고신 진주노회에 이금조 목사를 고발한 사건이 금번 노회에서 다뤄졌다. 진주노회는 이번 사건에 대해 ‘기각’결정을 내렸는데 이유인즉 증거가 불충분하고, 증인들이 직접 사인이나 도장을 찍지 않았고, 일방적인 진술 때문에 노회가 기각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현재 이 건은 이금조 목사가 해당 여성을 명예훼손으로 사회법으로 제소한 상태인데 검찰에서 조만간 결정이 내려질 예정이다.
하지만 진주노회는 물의를 일으킨 이금조 목사에게 건덕상의 문제점도 제기할 상태다. 진주노회측은 “금번 노회에서 다루진 않았지만 임사부에서 다음 노회시 건덕상 문제를 다룰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이번건은 결국 노회가 기각을 했기 때문에 여성도측에서 부전지를 붙여 총회 재판국으로 가져갈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총회 재판국은 과연 어떤 결과를 내릴지... 그리고 노회는 공로목사 문제를 다룰 수 있겠는가는 회의적이다.
박충렬 목회자 칼럼===
양극화의 부당성을 말하는 양심
노래를 부르면 춤을 춘다는 신기한 원숭이가 있었다. 돈 많은 사람이 원숭이를 사 집으로 데려 왔다. 그는 먼저 노래를 불렀다. 신나게 춤추는 원숭이를 생각하고 노래를 했지만 원숭이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었다. 다시 그러나 좀 더 흥겹게 노래를 불렀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 여전히 변함없는 자세로 서 있었다. 그래서 원숭이에게 따져 물었다. “야! 이 원숭이야, 너는 노래를 부르면 춤을 춘다고 하기에 많은 돈을 주고 사왔다. 그런데 왜 노래를 부르면 춤을 추지 않고 가슴에 손을 얹고 서 있냐?” 원숭이가 말하기를 “야! 임마, 니는 애국가를 부를 때 춤 추냐?”
생각도 없어 시류에 따라 흘러 갈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래서 노래만 나오면 춤을 출 수 있는 흥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보고 들으며 살아온 세월은 있어서 이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라치면 가슴이 답답하다. 세상 말로 권세 잡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말과 행동의 상반된 모습, 그것은 전혀 일치되지 아니한다. 어떤 편향된 목적을 향해 끌고 가는 것이 눈으로 보이는데도 부르는 노래에 따라 춤을 추라니 참으로 답답하다.
전철 안, 앵벌이의 틀에 박힌 외침도, 약물에 찌든 지하도의 구걸의 내민 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우리네 인심이다. 밭이 없어 고구마를 심지 않는 가정의 고구마 가마니가 작은 농사군 집 마당 보다 더 풍성한 농촌 가을 풍경이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담 넘겨 목을 빼어 아침은 먹었냐고 물어야 지나칠 수 있었다. 끼니를 건너뛸 수 있는 그 때에는 지나가는 이웃을 불러 양푼 밥그릇 가운데 두고 숟가락 하나 더 놓아 한 술이라도 먹게 하여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네였다. 날아다니는 까치에게도 먹을 밥이 있고, 함께 일하는 소도 배려하는 그 때, 사랑방은 길손의 거처라는 것을 익히 알았다.
그런 우리네 심성에 대고 20%의 부자와 80%의 어려운 사람들이라고 떠들어대니 참 딱하다. 그래서 부자들은 어쩌란 말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그냥 먹여 살린다는 뜻인지 도통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파트 한 채 분양받으면 1, 2억을 그냥 남긴다고 하니 이게 제대로 된 주택 정책은 아니련만 1억이 꿈의 숫자인 우리네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정책 입안 당사자들이 양극화를 말한다는 것에는 정당성이 없다.
선동에 약한,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말에 가슴부터 뭉클거리는 정에 얽힌 사람들의 심성을 잘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로는 양극화 해소를 외치는 그들은 어디에 사는지 어떤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지 현 시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신고 된 공시 가격만으로도 그 재산이 얼마인지 아는 자들이 얼마나 될까? 가난한 자를 위하는 체 하는 위선적인 행동은 저들이 누리고 있는 그래서 그 자리를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또 하나의 몸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규직을 과보호하므로 사용자는 일용직을 늘릴 수밖에 없고, 늘어난 비정규직은 동일한 일을 하고도 임금은 형편없고 자리의 보장은 하루살이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한다면 회사는 어쩌란 말인가? 정말 올바른 양심을 가졌다면 양극화라는 선동의 구호보다는 자기 것을 내어놓는 작은 실천이 먼저여야 한다. 자신이 깔아둔 트랩에 묶이지 않으려면, 그래서 정말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솔직함으로 자신을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해야 할 호소가 “나는 20%에 속합니다. 그러나 미래를 보장 받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 어쩌면 고르게 잘 살게 하지 못한 것은 정치하는 우리의 책임이라고, 그러나 모든 문제의 답이 정치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각자의 분야에서 분발하여 달라”고 말하는 것은 어떨까? 그러나 할 수 없는 것은 화인 맞은 양심의 숨은 계획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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