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의 갈림길에 선 김 변호사, 합수부 연행에 실패한 검거반


(731호에 이어)

△계엄합수부의 검거조가 들이닥쳐
계엄합수부(경찰, 안기부, 보안사)가 조를 편성하여 1980년 9월 15일 김광일 변호사를 비롯해 임기윤 목사, 이흥록 변호사 그리고 최성묵 목사 등을 연행하기로 D-day를 정한 것이다. 가톨릭의 인사인 송기인 신부, 오수영 신부 등은 이 계열에서 일단 빠졌다.
9월 14일, 부산YMCA에 사무실을 둔 필자에게 서부서의 윤 형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로는 말을 못하니 빨리 만나자는 전갈이었다. 법원 주변 모 다방에서 만났다. 김광일 변호사를 급히 피신시키라는 정보였다. 그는 자신이 말한 것을 비밀로 부쳐달라고 당부를 하고 떠났다. 나는 그길로 변호사 사무실에 갔다. 그런데 김 변호사는 법정에 변론하러 가서 자리에 없었다. 법원으로 가기 전에 그의 교회 친구인 부산대 교수 임정명 장로(당시 집사)에게 도움을 요청해 그가 타고 다니던 승용차를 법원 뒷문에 대기시켜놓고 나는 법원에 가서 쪽지를 건네주고 나왔다. ‘급히 법원 뒷문으로 나오세요. 합수부가 연행하려고 사무실에 대기하고 있으니 사무실로 가면 안 됩니다.’

△필사의 탈출, 007 작전
변론을 마치고 나온 김 변호사와 임 교수는 목적지를 아무도 모르게 피신하는데 성공했다. 사무실에 들어가 보니 합수부 검거반이 줄을 치고 변론을 하고 나오는 변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기다린 검거반 팀장이 “정보가 샜다. 그만 돌아가자”라면서 나가지 않는가.
그 다음날 다시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온 그들 팀장에게 필자는 “약속을 지키면 만나 진술은 받을 수 있소?” 그 약속은 무엇인데? “바로 보안사로 가지 않고 가까운 여관방을 하나 빌려 조사 진술을 받게 하는 약속이오” 한창, 중앙에 연락을 취한 뒤 허락을 받아 내는 것 같았다. 나는 만일 이 약속을 어기는 날에는 언론에 공개해도 좋고 부산 인권단체에 제소해도 무방하다는 구두약속을 받고서야 한번 협상을 시도해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 역시 확실히 지킬지는 김 변호사와 상의해야 되고 아직 연락이 닿지 않으니 하루 말미를 달라고 했다. 김 변호사는 시간을 끌어 달라고 했고, 시간을 끌었다. 그러자 들려오는 소문이 임기윤 목사가 망미동 보안사에서 취조를 받다가 그만 뇌졸중으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것, 아마 사망했을거라는 소식, 이흥록 변호사는 그곳에서 취조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때서야 합수부의 한 간부가 느긋해진 태도로 “별일 없으니 어느 장소에서든지 조사나 한번 받게 해주시오”라고 한 말을 김 변호사에게 전해달라고 하지 않는가. 아마 임기윤 목사 사망 사건이 터진 까닭에 느슨해진 듯 했다. 변호사 사무실 근방 여관방 하나를 빌리고 그곳에서 낮12시에 조사를 하도록 했다. 시간도 4시간을 넘기면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미 그들은 임기윤 목사가 쓰러진 것을 보고 교계가 어떻게 나오는지 당황하는 눈치로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였다. ‘이때다’라며 김 변호사가 숨어 있던 마산에서 변호사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여관 주변에는 몇몇 건장한 교회 청년 5명에게 지키게 하고 만반의 준비로 연행될 경우 육탄전으로 저지하는 대책을 세웠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점심 먹고 합시다”라고 하고 중국집에 음식을 시켰다. 배가 부른 후에 조사를 하면 느긋하고 축 쳐질 것을 예상하고 음식을 잔뜩 시켜 먹으라고 권했다. 아니나 다를까. 2시간 30분쯤 지나니 조사를 끝내고 간다는 것이 아닌가. 합수부에 연행되지 않는 것만으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때 임기윤 목사는 이미 대학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임 목사는 보안사 조사실에서 조사받을 때 “이북지령 받았냐”는 말에 “무엇이 어째”라고 책상을 치고 쓰러진 것이다. 훗날에 임목사의 순간 상황을 옆에서 함께 조사를 받았던 이흥록 변호사(당시 양서협동조합장)를 통해 듣게 됐다.
김광일 변호사는 그 후로 필자를 “내 친형제보다 낫다. 생명의 은인이다. 정말 수고했다”면서 좋아했다. 어느 날 대신동 김 변호사 집에 초대받아 갔더니 사모 문 권사가 김 변호사 몰래 금일봉을 내어놓고 “이번에 수고했어요”라면서 문서선교비로 사용하라고 하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도구로 나를 사용하신 것으로 알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받은 문서선교비의 일부는 사무실 경비로, 나머지는 교회에 감사헌금으로 드렸다.
김 변호사는 이때부터 신문사를 돕고 싶다고 했다. 교계신문인 (주)기독교신문(전 교회연합신문) 부산지사장에 취임예배를 드렸다. 그때 김 변호사는 인사말에서 “나는 평소 미국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신문과 같은 교계신문을 만들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었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계속…)

신이건 장로

201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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