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초, 국제신문 문화부 수습기자로 출발한 조갑제씨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부산중(1962), 1965년 부산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67년 부산 수산대학을 중퇴한 것이 그의 학력의 전부이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용케도 그곳에 들어가 취재할 길이 없어 절에 스님 옷을 입고 머리를 빡빡 밀고 들어가 시민군과 진압군들의 현장을 취재하여 특종상을 받았다. 그는 뉴스메이커로서 신문기자를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고 할 만큼 사건에 집념이 강하고 한 가지 일에는 끝날 때까지 파고 들어가는 천부적 기자근성을 지닌 신문 사나이였다. 그의 나이 이제 67세. (1945년생) 이제 머리에 백발이 무성해서 그를 감히 기자라고 부르기는 어려워 노숙한 대기자 조갑제라고 부르고 싶다. 10.26사건의 「有故」기록 1,2권을 월간조선에 연재한 뒤부터 일약 기자스타가 되었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 선임기자다.
1983년, 조선일보기자로 자리를 옮겨 2000년 12월, 월간조선편집장, 2001년 1월부터 10년간 월간조선편집장 겸 대표이사직까지 오를 수 있었다. 보통 조 기자는 한국 정치사회의 굵직한 대형사건을 초점으로 게재하는 사건기사를 다루면서 그의 인기는 상승되고 이제는 신·불신 간에 조갑제 대기자로, 외부강사로, 보수진영의 단골강사로 알려진 보수진영의 논객이 되었다.
▲ 국제신문 기자 시절에는
문화부기자 시절 미문화원 도서실에 박혀 관계기사를 일일이 확인하며, 견문을 넓혀왔다. 그의 글 중, 박정희 전기(13권)는 유명하다.
군부 대폭발, 국가안전기획부,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코리안 커넥션, 김현희의 하나님, 12.12사건-정승화는 말한다, 김대중의 정체·북한-그 충격의 실상 외, 많은 기사로 한국기자상(중금속오염의 추적)-1974년 국제신문, 부산대학 미술실기시험유출사건특종(1975년, 국제신문) 포항석유 경제성이 없다(특종 1976년 국제신문)마산만 어패류 채취금지 특종(1979년, 국제신문) 부산 김근하군 유괴살인사건의 내막-하느님만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심층취재/KAL에 칼을 댄다-대한항공의 안전문제, 부마사태와 10·26 사건의 내막( 월간조선1985.5·6월호), 한국내 미CIA의 내막(1986년, 월간조선), 정승화 입열다.(1987년 9월), 전두환의 금맥과 인맥,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6·29선언은 전두환의 작품이었다(1989년, 6월호), 한반도의 핵게임(1990년 3월), 전두환의 육성증언-6·29의 진실(1992.1·2월호)등 한국 근·현대사에 큰 사건시 마다 그가 손 안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역대 대통령과의 단독인터뷰는 그의 특유한 노하우였다. 그는 1974년 제7회 한국 기자상(한국 기자협회)-중금속오염의 추적 1990년, 한국잡지협회제정 잡지기자상,1994년 관훈클럽언론상-북한 인권문제보도부문 등 기자로서의 큰상을 다 휩쓸었다. 그의 어머니는 교회권사로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는 기성교회의 실상과 허상을 일선기자로서 온갖 것을 알고 있는 그의 체질에 신앙이 싹트진 못하고 주일날 한번 나가는 선데이 크리스천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교회, 기관 초청에도 빠지지 않고 강연으로 쫓아다녀 이제는 매월 한번 씩 부산일보 강당에서 마지막주 토요일 입추의 여지없는 어른들이 즐겨 찾는 조갑제 닷컴 강연에 주강사로 시사평론을 단골로 강의한다.
하나, 특이한 부분이 있다. 한때 대정부, 귄력과는 터부시하는 신문기사체질로서는 반골에 가까운 신문기자가 어느 날부터인가 친여체제이기보다 보수진영의 단골 강사로 보수논객의 대부가 된 것은 어떤 사유인가가 미스터리이다.
▲ 보수에서 진보로 돌아선 정영문 목사
한편, 부산에 사는 교계인사라면 누구나 아는 정영문 목사(시온중앙감리교회 원로)는 한때 60~70년대까지 한국교회 대표적인 부흥강사였다. 정 목사의 강단 은혜로 목사가 된 신현균 목사, 오관석 목사는 정 목사의 카리스마에 매료되어 영적 아버지로 모셔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정 목사는 80년대부터 정부에 맞서 PNCC계통의 최일선에 나서 시민운동, NGO활동 그리고 신·구교일치회, 종교평화주의와 종교 다원주의에 심취된 인사로 유명하다. 보수계에서 180도 전환한 진보진영의 일선에서 활동하는 그 이유도 미스터리다.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정 목사는 개인주의적 영혼구원에 집착한 일류 부흥사가 다종교, 사회구원으로 전환한 영향에는 감리교신학자 변선환 교수의 감리교 교수제명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두 인물에 대해 지금도 한국교회 부산교계에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할까.
부산 시민운동가들이 TV화면에 나올때마다 빠지지 않고 늘 얼굴을 보이는 80대 노익장 정 목사의 정체 역시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것도 하나님이 아실것이다.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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