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년대 부산교계의 거목 유형심 목사


1970~1980년대 부산교계 목회자 가운데 가장 청년, 대학생들로부터 영적지도자로 잘 나간 목회자로 호평을 받은 분이 있었으니, 그분은 다름아닌 부산성동교회를 담임했던 유형심 목사(79세)이다.
유 목사는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지금 동아대학동아의료원에 입원 중에 있다.
△ 엘리트 목회자 유형심 목사
부산성동교회(담임 이병석 목사)가 세워진 해는 피난시절 부산으로 이북에서 내려온 믿음의 형제들 함경남북도, 신자들이 주측이 되고, 이들이 1950~1953년 부산 용두산공원 언덕배기에서 여기저기 모여 가정에서 옮겨가면서, 피난민촌의 집착촌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고향 산천을 뒤로 하고 오로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믿음의 고향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릴 때마다 눈물 없이 어찌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1957년 이들이 모여 중구 대청동 2가에 관북교회를 세운 것이 부산성동교회 효시였다.
함께 월남한 고향인사 가운데, 유형심 목사가 한양교회(지금의 은성교회 전신)에서 목회를 하던 중, 관북교회가 유 목사를 청빙하였고, 유 목사가 아직 젊어 일본에 유학을 보내기로 하여 1961년 3월, 유학 송별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부두 환송예배까지 치러졌다.
그 당시 교회중직자로는 이규복, 고두성, 안홍복, 서강혁, 라진교, 김순오, 채제옥, 한인수, 홍순봉, 김경홍, 김순규, 방창신, 이창승 장로들이었다.
이들 중 김순규 장로는 유 목사의 사모 남동생이니까 처남이고, 이창승 장로는 김순규 장로의 외사촌 형님이 되는 촌수라 유 목사의 외사촌 처남매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집안 가족들이 뒷날에는 원수가 아닌 원수가 되어, 서로 갈라지는 교회분규의 원인이 되었지만 그래도 부부 간의 다툼마냥 물에 칼 배기 식이어서 잔잔한 날이 없을 정도로 교회 내 갈등이 오래(약 10년간) 계속됐다.
하지만 유형심 목사는 일본 동경신학대학 신학부에 수학한 후부터 신흥문물을 배워, 신학적 세계에 박식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젊은 대학생, 특히 부산 해양대학교 학생들이 주일날 자리를 메워 그들에게 정신적 리더로서 미래에 대한 도전정신을 불어 넣는 메시지가 강렬하여 그들의 지도자가 되게 했다. 요즘 같으면 젊은이들의 정신적 대부로 인기가 대단했다.
서양학문을 소개하고 신학적 사고를 넒혀 나가는 그의 메시지는 젊은 대학생들에게 어필됐다.
그 당시 도하 국제신문 춘추란에 글을 게재하거나 부산교계의 청년 아카데미운동을 전개하는 등 부산YMCA, YWCA에 수없이 강사로 초대되어 강연했다.
교계신문에는 유 목사의 단골칼럼 임상(목양)이 수년간 연제되었다.
△유 목사의 인간성과 삶의 배경
유 목사는 일본의 신지식을 배워, 새로운 미래의 세계를 열어나가는데 비전과 꿈을 전달하게 되니까, 저절로 수많은 청년, 대학생, 지식인 성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금의 중구 부평동에 위치한 200여평 남짓한 교회당 안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빼곡히 차고 넘쳤다.
잘 나갈 때는 반드시 마귀가 그냥두지 않았다. 내부의 친척끼리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창승 장로는 유 목사를 노회에 고발하는 사태까지 벌였다. 평소 유 목사의 행동은 삶과 일치했다.
때로는 젊은이들의 친구가 되기도 할 때 그들과 어울리면 맥주 한 잔 정도를 나누고 대화를 하다 보니,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술이 사람을 몰아넣고 말았다. 그 당시 회자되는 고발 소설 ‘꾸부러진 길, 패역한 무리들’이란 소설의 주인공이 유 목사를 풍자했다. 그 소설의 저자는 친척 이창승 장로였다. 이렇게 대립한 싸움이 10년이 흘러 결국 이창승 장로는 서울로 떠나게 되고 유 목사는 이미지가 흐려지게 되어, 교회에서 조용히 정년은퇴를 하게 되었다.
그의 주변 인사 가운데, 그의 처남 김순규 장로는 광복동 입구에서 고전다방을 열고, 클래식 음악다방으로 유명했다. 뒷날 김 장로는 국제와이즈멘 클럽 와이즈멘 운동과 부산YMCA 청년운동 그리고 기드온캠프 운동을 펴왔다.
김 장로는 몇 년 전 세상을 떴다. 그렇게 지독히 싸운 이창승 장로도 서울에 가서 한국교회를 상대로 개혁운동을 일으켜, 한국판 제2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자로서 한몫했다. 그도 세상을 떴고, 방창신 장로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유 목사를 따랐던 교계인사로는 정권섭 장로(당시 강도사), 부목사로 있었던 이만규 목사, 김정강 목사 등 수없이 교계인사들이 그의 곁을 스쳐갔다. 그는 지금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계신다. 그의 인자하신 사모는 남편 목회자의 뒷바라지를 평생 도와오고 있다. 그의 자녀들 중 큰아들 삼열(관동대 교수), 둘째는 미숙권사(고신대 교수)와 남편은 최종정 장로(경남 정보대 교수), 셋째는 진열(건축업), 넷째는 미영(남편은 서울대 교수)이다.

2011.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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