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에 서서
본문/시편 90편 1-17절
며칠 전 경남 사천의 모 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오후 4시쯤 출발해서 남해고속도로를 거쳐 사천까지 서쪽 방향으로 차를 달렸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든 생각은 저만 서쪽으로 달리는 게 아니라, 태양도 서쪽으로 달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태양은 서쪽으로 기울면서 사위를 비추어 온 산하와 들녘이 빛으로 가득했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한 시간 남짓한 그 시간은 황홀한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날 저는 태양과 같은 방향으로 달렸습니다. 그 방향은 서쪽이었습니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집니다. 인생도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쪽은 떠오르는 방향이기에 소망으로 충만하고, 서쪽은 지는 방향이기에 슬픔과 섭섭함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누구도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기울어가는 태양을 다시 동쪽으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늙어가는 인생을 어린 시절로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인생을 슬퍼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동쪽으로 되돌리려는 희망 없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차라리 담담히 받아들이고, 남은 시간이라도 아름답게 사는 것이 현명합니다.
호렙산 근처를 뜨겁게 내려 쪼이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면서 주변의 광야를 온통 붉게 물들이던 어느 날 황혼 무렵에 양떼들 곁에서 한 남자가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그는 모세였습니다. 이미 그의 나이는 칠십에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연수가 보통 칠십이며, 강건하다고 해도 겨우 팔십 정도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그는 그 보잘것없는 인생조차도 수고와 슬픔뿐이며, 마치 날아가듯 신속히 간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 그는 애굽에서 왕자로 살던 때의 일과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기 위해 애굽인을 죽였던 일과, 그것이 발각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한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한 때 너무도 간절히 애굽으로부터 자신을 찾는 소식이 들리길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삼십 년이 지나고 보니 더 이상 희망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부질없는 일을 기다리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남은 날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든 인생이 가져야 할 지혜는 자신의 남은 날을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이며, 그 남은 시간을 현명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남은 인생 동안에 기쁨을 주시길 기도했습니다. 시편 90편은 모세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 후 모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세는 인생이란 길어도 팔십 세 정도라고 생각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일백 이십 세까지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일백 이십 세까지 살았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인생 후반부를 더 아름답고 귀하게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십 년 동안 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졌고, 가나안 땅 입구까지 인도했습니다. 그 사십 년이 있었기에 우리가 기억하는 위대한 모세가 있게 된 것입니다.
11월은 황혼을 느끼게 하는 달입니다. 12월은 이미 해가 서산으로 진 후처럼, 그래서 이미 뜰에 어둠이 덮인 시간처럼 마지막을 진하게 느끼게 해 주는 달이라면, 11월은 태양이 마지막 붉은 빛을 뽐내는 시간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12월보다 11월이 더 슬프고 애잔합니다. 맥없이 떨어지는 낙엽들 하나하나가 바늘처럼 저를 찌르는 것 같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벌써 하는 일도 없이 늦가을을 맞이했다는 아픔이 너무 큽니다. 이제 우리도 황혼을 바라보면 서야 합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남은 시간을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지난 시간 전체보다 훨씬 아름답게 살고자 다짐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어떻습니까? 지는 태양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 서쪽을 향해 서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모세의 기도를 우리 각자의 기도로 바꾸어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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