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고 소유하고 매매하는 제도를 초기 기독교회가 용인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다. 노예제도는 고대에서 19세기까지 유지되었고, 이것이 합법적인 제도였다는 사실은 인간 역사의 어두운 뒷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모든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강조했던 기독교 전통에 굳게 선 나라에서 조차 노예제도가 건재했고, 노예무역이 한 시대의 경제구조의 핵을 이루었다는 점은 믿기지 않는 일이다. 노예제는 로마제국의 근간이었듯이 대영제국의 영화는 노예무역과 하층민의 고달픈 삶이 일궈낸 결실이었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영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을 때, 존 폴록(John Pollock)은 “영국국민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도덕적 업적”이라고 했고, 역사가 트레벨은 “세계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던 것을 보면 노예제도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반 도덕적인 제도였던가를 드러내고 있다.
기독교가 발생하는 1세기 당시 노예는 법적으로 인간이 아니라 물건(res)이었고, 재산(peculium)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이도 노예는 “살아있는 도구이며, 도구는 생명 없는 노예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주인은 노예의 생사여탈권(jus vitae necisque)을 지닌다. 한 사람의 사회적 위치는 그 사람이 소유한 노예수에 따라 측정되기도 했다. 노예는 주로 전쟁포로들이었지만 가사노예를 포함하여 농장, 광산 등지에서 일하는 산업노예, 도시 노예, 그리고 황제의 노예(familia Caesaris) 등 다양한 환경에서 일했다. 로마인들은 노예제를 경제와 결부시켰다.
일단 노예가 되면 영원히 노예(semel servus semper servus)이지만, 특수한 경우에 노예가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노예들이 해방의 가능성이 있었다 할찌라도 실제로 그것을 성취하는 일은 매우 어려워 우리식으로 말하면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해방된 경우를 ‘해방된 노예’(freedmen)라고 하는데, 해방 노예가 즉시 완전한 시민으로서의 법적 신분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중 일부는 상당한 지위와 명예를 누렸다는 사실이다. 전형적인 로마의 관료직이나 성직은 해방된 노예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어떤 노예는 기술과 근면으로 상당한 부를 누리기도 했고 중요한 직을 얻기도 했다. 페트로니우스(Petronius)는 그의 Satyricon에서 부를 얻은 저속한 해방된 노예를 비꼬는 글을 남겨주고 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Claudius, 41-54)는 자기 집의 노예로 있던 해방된 노예들에게 제국의 고위직을 수행하도록 하기도 했다. 예컨대, 유다지방 총독 벨릭스(Felix, 행 23:26)는 황제의 노예출신이었으나 총독의 지위에 올랐으니 대단한 성취였다. 벨릭스총독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비서 중 한 사람이었던 팔라스(Palas)의 형제이기도 했다. 노예였던 팔라스가 황제의 비서가 된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벨릭스는 비록 노예출신이었으나 왕가 출신의 3부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의 3번째 부인이 두르실라(Drusilla)였는데, 그녀는 아그립바 2세(Agrippa II)와 베르니스(Bernice)의 여동생이었다.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의 역사책에 자주 인용되는 그의 성격은 “노예로 있었던 때의 감각으로 모든 종류의 잔인함과 정욕으로 자신의 통치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벨릭스의 형제였던 팔라스는 클라우디우스의 재정 비서였는데 악명 높은 아그리피나(Agippina)가 자기 아들 네로(Nero, 54-68)를 황제로 앉히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네로는 8년 후 팔라스의 돈을 빼앗기 위해 그를 처형했다. 이 때가 62년이었다. 네로는 자신의 어머니 아그리피나까지 처형했으니 은덕을 원수로 갚은 경우였다.
위대한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투스(Epictetus)는 노예 출신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주인에게 심하게 구타당한 일로 일생 동안 절음발이로 살았으나, ‘획득한’이라는 자신의 이름처럼 학문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55경 프리지아의 히에라폴리스 출신인 그의 가르침에는 종교적 성향이 짙어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다고 한다. AD 90년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폭정에 반대하는 스토아학파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런 이유로 그를 로마에서 추방했다. 이들이야 말로 한 시대의 엄청난 사회적 차별과 차등의 벽을 넘어 자신의 길을 개척해간 입지적인 인물들이다. 노예 중에 탁월한 장인이나 교사나 의사들도 없지 않았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해방된 노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노예제도는 분명히 반 인간적인, 그리고 반 도덕적인 제도이지만 그 당시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드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도 노예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했다. 구약성경에서 노예들에게도 안식일에는 쉬게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신5:14), 초기 기독교는 노예제도의 해체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사실 히브리 만족도 사실상 에집트의 노예였지만 그 제도를 부정하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도 주인들에게 노예들에게 사랑과 선대를 강조하면서도, 노예들에게는 주인(상전)들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점을 주지시켰다(엡6:5-8, 딤전6:1-2. 딛2:9-10, 벧전 2:18-9). 그러면서도 노예제도의 폐지를 말하지 않았다.
이런 점들에 대해 기독교 변증가들은 바울의 이런 태도는 종말론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했다. 곧 종말이 올 것으로 보아 사회나 제도적 변혁에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기독교회가 노예문제에 대해 다소나마 전향적 입장을 보인 것은 2세기이후라고 해석한다. 주인과 노예 사이의 상호 존경을 권했고, 그리스도인 주인들이 휘하의 노예들을 개종하도록 노력하기를 희망했다. 교회의 구성원들로 노예를 받아드렸고, 4세기 이후부터 ‘교회에서 노예해방’(manumissio in ecclesia)이라고 하는 실천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지만 여전히 노예제에 대한 변개는 없었다.
4세기 스페인의 엘비라공의회(The spanish Council of Elvira)는 여성 노예를 죽게 한 여성보다도 간음한 여성을 더 심하게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간음을 더 심각하게 생각했지 노예의 생명은 그렇게 심각한 문제로 받아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기독교권에서 노예제도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이를 반대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노예제도를 반대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c. 335-394)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외로운 광야의 왜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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