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 곧 이상향을 동양에서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했지만, 서양전통에서는 유토피아라고 불렀다. 무릉도원이란 말은 도연명(陶淵明, 365-427)의「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비롯된 말로서 평화롭고 조용한 이상향(理想鄕)이란 뜻이다. ‘도원경’(桃源境)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이 인간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로 여겨져 왔다. 그렇다면 서양전통의 이상향인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유토피아란 ‘좋은(eu)-곳’(topia)이긴 하지만 사실상은 아무 곳에도 ‘없는(ou)-곳(topia)‘이란 뜻이다. 그러나 마치 그것이 인간의 지혜와 기술과 능력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인 양 역사의 질곡마다 이상의 나라를 끊임없이 추구해 왔지만 이상향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룰 수 없는 무망(無望)한 바램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상향을 ‘코케인’ 곧 ‘환락의 나라’라고 불렀다. 그 곳에는 모든 희망이 이루어지고, 성(性)을 포함한 모든 욕망이 충족되는 나라였다. 그곳에 있는 ‘젊음의 샘’은 노년의 때를 상정하지 않았다. 이 지상낙원은 아르카디아(Arcadia, 樂園國)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것이 황금시대(Golden age) 혹은 지상낙원(Paradise)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와서 영국의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라’고 불렀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런 이상의 세계를 역사의 종국에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으로 불렀다.
인간이 유토피아를 꿈꾼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이 고달프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항구적인 안녕과 평화에 대한 갈망은 현실의 저편을 갈망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현실이 암담하면 할수록 유토피아적 소망은 더욱 강열한 힘으로 나타났고, 한 시대의 민중운동을 이끌어 갔다. 어떤 점에서 모든 종교의 종착점은 비록 고도의 정신언어로 추상화한다 하더라도 바로 이곳, 안녕과 평안의 만세반석이었다.
그런데, 이 유토피아적 희망은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쳐 오면서 낙관론 혹은 진보주의로 발전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중세적 세계관이나 형이상학적 신앙의 권위를 혐오했다. 이제 그들은 ‘계시’의 위치에 인간 ‘이성’(理性)을 대치시켰다. 인간의 이성적 통찰과 오성을 통한 인간자율주의는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였다. 테렌츠(Terenz)의 유명한 격언, “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이 아닌 것은 나에게 낯설다.”(Homo sum, humani nihil a me alienum puto)는 말은 인간중심적인 계몽주의 정신을 대변해 준다. 이제 인간에게 맞지 않는 이념과 체제는 파기되어야 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들러리가 아니라 인간은 역사와 우주의 중심에 좌정했다. 이성은 이제 제왕(帝王)이었다. 계몽주의는 이런 인간중심의 세계사적 각성의 표현이었다. 볼테르(1694-1778), 에드워드 기번(1737-1794), 그리고 불란서 사회철학자 꽁도르세(Marguis de Condorcet, 1743-1794)는 이런 입장을 대표했다.
말하자면 18세기를 거쳐 가면서 인간 이성을 절대시하는 합리적 개념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는 역사 안에서 유토피아를 향한 진보의 개념으로 세속화되었다. 이것은 인간관의 근본적인 변화를 반영하는데,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 지상의 천국을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사상이 독일 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하나님 나라의 내세성은 지난 역사의 유물로 간주되었고, 지상천국, 곧 신국의 내재화(內在化)를 주창하기도 했다. 미국의 경우 월터 라우션부쉬(Walter Rauschenbusch) 등을 통해 사회복음 운동(Social Gospel Movement)으로 발전했다. 이런 유토피아적 기대에 영향을 준 것은 흔히 3가지로 지적된다.
첫째는 과학 기술의 놀라운 발전이었다. 뉴톤의 만류인력의 발견 이후 자연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미래에 대한 낙관론적 기대를 증폭시켰다. 이제 인간은 과학의 힘을 통해 신의 도움 없이도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이상의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자만하게 되었다. 이것이 과학제일주의였다.
둘째는 진화론(Darwinism)이었다. 진화론에 의하면 인간은 야만적인 상태에서 부단한 상승 운동을 통해 보다 더 인간적인 상태로 진보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 내부의 악도 점차 소멸되고 제거될 것으로 이해했다.
셋째는 1815년부터 1914년까지 약 100년간 유럽에서 대륙규모의 전쟁이 없었다는 점이다. 약 100년간 전쟁이 없는 상태에서 미래에 대한 진보의 이념은 정점을 향해 줄기차게 나아갔던 것이다. 이런 낙관론에 근거한 유토피아적 이상은 양차대전을 거치면서 그 효용성을 상실했다.
이런 유토피아적 낙관론의 근본적 오류는 인간 내부에 여전히 유전(流轉)되고 있는 인간의 죄와 타락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죄의 위력을 상정하지 않는 인간이성의 절대화는 시간의 피안에 있는 기독교적 소망을 상실하게 하였고, 기독교적 소망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진보’로 이루어질 수 있는 지상의 유토피아를 대치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는 처음부터 허망한 바람이었던 샘이다.
타락한 존재로서의 인간, 이것은 칼빈주의 신학의 요체이다. 인간 내부에 있는 본질적인 죄와 악이 제거되지 않는 한 이 땅의 유토피아란 이름 그대로 ‘아무 곳에도 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일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