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과의 접촉‘며리계’에서 미국(美國)까지
1882년 5월 22일(음력 4월 6일) 정오무렵, 연초록의 숲으로 뒤덮힌 작약도(芍藥島)가 마주 보이는 화도진(花島鎭)의 만석동에 설치된 장막안에서는 훈풍에 실린 비릿한 갯내음이 스치는 가운데 한국과 미국과의 최초의 조약이 채결되고 있었다. 장막 앞에는 미국 국기가 꼿혀있었고, 양키 두들송이 바람에 실려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지금의 인천시 화수동(花水洞)에 위치한 이곳에서 미 해군 제독 로버트 슈펠트(Robert W. Shufeldt, 1822-1895)와 한국 전권대신 신헌(申櫶, 1810-1888)은 전문 14관(款)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채결했다. 슈펠트 제독이 “구름같기도 하고 그림같기도 한” 영문 서명을 하고 나자 신헌은 묵직한 도장을 찍었다. 이것이 한국과 미국과의 최초의 조약이자 한국이 서양의 나라와 맺은 최초의 조약이었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날인(捺印)과 서명(signiture)의 첫 만남이라고 했다.
이것은 지난 20여년간의 미국과의 간헐적인 접촉의 결실었다. 미국인이 조선에 관심을 갖게 된 시작은 1845년이었다. 아편전쟁의 결과로 미국과 청나라 간의 무역이 확대되자 미 하원 해군문제 위원회 자독 프래트(J. Pratt)위원장은 1845년 2월 12일 대일(對日) 및 조선과의 통상교섭 결의안을 제출한 바 있다. 비록 국내사정으로 이 결의안은 채택되지 못했으나 조선은 일본과 함께 항상 미국인의 관심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최초로 조우한 것은 1852년이었다. 이해 12월 21일(음력, 철종 3년) 동래부 용당포(龍塘浦) 앞바다에 대피한 미국의 범선이었다. 이 배에는 미국인 42명, 일본인 2명이 승선하고 있었는데, 현지 관원들이 조사하 바에 의하면 미국의 포경선이었다. 1850년대 미국이 북해도 근처에서 포경업을 활발하게 전개했음을 고려해 볼 때 이 배는 포경선으로 짐작된다. 언어의 불통 때문에 이 첫 조우는 서로를 인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우리 측 기록 ?일성록?에 의하면, 그들은 선박을 가리크며 ‘며리계’를 연호하였다고 한다. 아메리카(America)를 우리 나라 관리는 ‘며리계’로 듣고 그렇게 표기했던 것이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아 필담을 시작했지만 그들이 쓴 글씨는 구름같기도 하고, 그림같기도 하고, 전서(篆書)도 언문도 아니어서 도무지 알아볼 수 가 없었다.” 지방관리의 보고대로 언의 불통 때문에 어쪄면 국익의 호기가 될 수 있었으나 우연한 해후로 끝나고 말았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1855년(철종 6년)에는 미국 포경선 ‘투 브라더스’(Two Brothers)가 동해를 항해하던 중 선원 4명이 배에서 탈출하여 강원도 통천군 임도면 남애진(南涯津)에 상육했다. 이들이 왜 배에서 이탈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들이 우리나라 땅에 상육한 최초의 미국인들이었다. 현지 관리들의 조사가 있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 이들이 어느 나라출신이며, 상육 경위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육로로 귀국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짐작하고 이들을 일단 중국으로 호송하게 된다. 호송관이었던 이규익(李閨益)이 북경에 가서야 이들이 화기국(花旗國) 미리견인(彌利堅人)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화기국’이라는 이름은 미국인들에 대한 중국 광동인들의 호칭이인데, 미국 선박들이 그들의 ‘화기’(花旗), 곧 ‘성조기’(星條旗)를 건 일에서 기원한 이름이다. ‘미리견’이란 이름 역시 중국에서 사용된 미국에 대한 칭호로서, 세계인문 지리서인 ‘해국도지’(海國圖志, 1844)에서 사용된 용어였다.
즉 오늘 우리가 미국이라고 부르는 이 나라를 ‘며리계’라고 호칭하거나 중국의 방식대로 화기국(花旗國), 혹은 미리견(彌利堅)으로 부르기도 했고, 후에 미국(米國)을 거쳐 지금의 미국(美國)으로 칭하게 된 것이다.
1860년대 이후 미국선박의 출현은 보다 빈번해 지기 시작한다. 1865년(고종 2년) 8월경에는 미국인 선원 3명이 경상도 연일현(延日懸) 연안에 상육하였다. 괴기한 이방인들에 대해 우리나라에서는 관대하게 대했고, 이들에게 어선을 주어 해로로 귀환토록 했는데, 도중에 풍랑을 만나 다시 강원도 삼척의 초곡동(草谷洞)에 다시 표도하였다. ‘승정원 일기’(고종 2년 8월17일, 9월 4일)에 의하면 그들의 희망에 따라 의주를 거쳐 북경으로 돌려 보냈다. 조선 관리들은 이들 미국인과 접촉하면서 언어도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이름이나 지명을 한문으로 표기하기가 너무 어렵고 정확하지도 않아 1866년부터는 한글로 표기하기 시작한다. ‘일성록’(日省錄) 1866년 5월 21일(음력)난에는 “서양 인명과 지명을 한자로 기록하기 어려워 언문으로 기록했다”는 철산부사(鐵山府使)의 보고와 함께, “난파된 배는 화기국(花旗國)의 상선으로서 ‘미ㅾl쓸넌’과 ‘미실낙기’는 화기국(花旗國) 누야우地에 산다.”는 식이었다. ‘누야우’는 뉴욕(New York)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지만, ‘미ㅾl쓸넌’과 ‘미실낙기’라는 사람 이름은 아무리 견주어도 헤아리기 어렵다.
1866년 2월에는 미국상선 한 척이 부산진 사등(沙嶝) 앞바다에 나타났다. 부산진의 관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사불’(士佛)이라고 불린 이 선박은 미국소속의 금산선(金山船)이었다고 한다. 미국인 6명과 중국인 2명이 승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선막은 일본 장기(長崎)에서교역을 마치고 본국으로 귀국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고, 음식물을 구하기 위해 부산진으로 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먼곳(遠地)에서 온 이들을 편안하게 대우한다는 소위 ‘유원지의’(柔遠之義) 방침에서 이들에게 생선, 과일 닭 등을 제공하였다. 1866년 5월에는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Surprise)호 선원들이 평안도 철산부 선사포(宣沙浦)에 표도(漂倒)한 일도 있다.
그러나 한미 관계를 엮어가게 되는 중요한 사건은 1866년 8월에 발생했던 제너널셔먼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토마스목사(1839-1866)의 순교와 더불어 잘 아려진 일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승무원 전원이 살해당하게 되자 이 사건을 보고받은 주청 미국 대리공사 윌리엄스(Samuel Wells Williams, 1812-1884)는 조선측에 승무원들의 생존여부를 확인하는 한편 현지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미국정부는 해군중령 슈펠트에게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래서 슈펠트는 1867년 1월 23일 와추세트(Wachusett)호를 이끌고 조선 서부해안에 도착하게 된다. 1868년에는 페비거(John C. Febiger)중령이 이끄는 쉐난도(Shenandoah)호를 파견하기도 했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인이 조선 해안에서 조난당했을 경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 조선측과의 조난선원 구조협정 뿐만 아니라 통상조약까지도 체결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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