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와 통치 이데올로기
일본의 소위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일본 후소샤(扶桑社) 발행 역사 교과서가 문제시 되고 있다. 검정을 통과한 이 교과서에서는 주변국가에 대한 침략행위를 은폐하거나 축소하고, 일본에서 ‘진출’이라고 말하는 침략전쟁이 아시아 민족의 해방에 기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교과서는 과거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관련된 객관적 사실을 기존의 교과서보다 대폭 축소하거나 대폭 미화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후소샤 발행의 역사 교과서에 대한 우리나라의 반응은 이 교과서가 역사를 어떻게 축소하거나 왜곡하고 있는가에 집중되고 있다. 물론 이 점에 대한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점은 이런 교과서를 만드는 이들의 이념적 혹은 사상적 배후에 대한 관심이다.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우파 지식인들로 구성된 단체이며, 이들은 일본에서 일고 있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nationalism)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과 같이 ‘국제화’ 시대에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군국주의는 극단적 민족주의의 한 형태인데, 우리는 교과서 문제를 통해 전전(前戰)의 황도주의의 복구를 염원하는 일본의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주변국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일본 총리의 거듭된 야스꾸니신사 참배, 일본 각료들의 거듭된 망언은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오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역사 왜곡 그 자체보다도 그런 ‘역사의 왜곡’을 통해 아시아의 평화를 파괴했던 침략전쟁을 ‘미화된 역사’로 일본의 청소년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국수주의적 의도이다.
문제는 이런 민족주의 혹은 국수주의적 흐름이 단회적인 조류가 아니라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이념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그것이 교과서이고, 그 드러난 일단이 문부성 검정을 통과한 후소샤 간행의 교과서인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 교과서는 단지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정신을 가르치는 이념서인 셈이다. 역사 교과서만이 아니라 국어 교과서는 차세대 그 나라의 국민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이념과 정신을 반영한다. 특히 국정 교과서나 검정 교과서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특히 정부가 편찬하는 국정 교과서는 그 시대의 국가나 정부가 그 시대 국민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국가정책 혹은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것으로서 그 시대의 가치를 드러낸다. 이번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은 바로 일본의 군국주의적 이상을 드러낸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런 경우는 최근의 일만이 아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도 동일했다. 예컨대, 조선총독부는 1937년(소화 12년) 신학기에 맞추어 초등교육용 ‘조선어독본 권1’을 펴냈는데, 이 교과서 제1과 제목은 ‘소’(牛)였다. 국민학교라고 불리는 공교육을 시작하는 학동들에게 제일 처음으로 가르치는 주제가 바로 ‘소’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는 주인에게 묵묵히 순종하는 동물인데, 이 소를 조선인에 대한 상징으로 제1과에 둠으로서 조선총독부는 일제의 요구에 저항 없이 따르는 황국신민을 양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 교과서 제2과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등장하는데, 소나무는 청청함과 지조를 상징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소나무는 등이 굽고 뒤틀린 나무로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버드나무와 함께 적당히 그 시대에 타협하고 살아가는 인간상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런 시도는 국어 교과서만이 아니라 조선총독부가 검정한 모든 교과서에 나타나 있다. 예컨대, 1940년에 발행된 ‘초등창가’(唱歌) 제4학년용에는 ‘청국신사’(靖國神社)란 제목의 노래가 실려 있는데, “호국(護國)의 신과.... 훈공(勳功)을 대대로 드러내고....”로 이어지는 4절로 된 가사가 실려 있다. 1943년 간행된 ‘초등습자’ 5학년용 앞부분에는 “靖國神社參拜”가 나오고 이를 반복해서 쓰도록 함으로써 신사참배를 자연스럽게 받아드리도록 유도했다. 이런 것들은 전쟁정책을 학습시키려는 의도였다. 1944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초등습자’(習字) 제6학년용에 보면 더 노골적으로 일제의 전쟁정책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국정교과서의 첫 과는 그 시대의 정신과 교육이념을 반영한다. 국어 교과서의 첫 문장은 언어교육을 넘어 교육철학을 보여준다. 해방 후인 1945년 11월 군정청 학무국은 국어 교과서, ‘한글 첫 걸음’을 발행했는데, 제1과의 제목은 ‘바다, 나라, 가자’였다. ‘가자, 다 가자, 나가자, 다 나가자’로 시작되는 이 과를 통해 해방된 나라에서 넓은 세계를 향해 일어서 함께 일하며 민족 재건을 고취하고자 하는 교육이념을 드러낸 것이다. 1958년 필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국어교과서 제1과는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이리 오너라, 바둑아 바둑아 이리 와, 나하고 놀자.’ 등이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가족적인 평안한 그 시대의 모습을 반영했다. 동시에 이것은 국가가 분명한 교육의 지표를 확립하지 못한 무 이념적인 상황의 반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73년 유신 이후에는 유신의 정당성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교과서에 반영되었고 이 점 또한 논란을 빚은 일이 있다. 이 당시 제1학년 국어교과서 제1과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 너, 우리나라, 대한민국.’ 처음으로 학교교육을 받는 아이들에게 공동체 의식과 함께 국가의식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 후에는 제1과가 이렇게 시작된다. ‘나, 너,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 어머니 우리 어머니, 아기 우리 아기, 아버지 어머니, 나 아기 우리 가족.’ 유신의 그늘에서 벗어나 주체(나), 객체(너), 공동체(우리)를 일깨워주면서 가족중심으로 사회적 관계성을 가르치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에서 가족중심으로 사회성을 가르치는 일은 오늘의 사회에서 중요한 교육일 것이다. 이런 점이 반영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다소 완화되자 교과서에도 이런 점들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또 이전에는 국어교육이 읽기 위주의 언어교육이었으나, 1987년부터 적용된 제5차 교육과정부터 변화가 나타났다. 종전의 국어교육을 언어사용 기능 신장에 역점을 두어 정확한 표기, 정확한 발음, 어휘력 향상, 표현과 이해력, 그리고 창의적 사고 신장을 위한 학습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그래서 초등학교에서 국어라는 교과서는 없어지고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의 3권으로 나눠져 영역별 지도가 시행되고 있다. 또 교과서도 2종류로 구분되어 교육인적자원부가 저작권을 가진 도서를 1종교과서라 하고,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의 검정을 받은 도서를 2종교과서로 구분하고 있다. 교과서는 사전적으로 말해서 ‘학교에서 교육을 위하여 사용되는 학생용의 주된 교재’를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교육을 위한 교재만이 아니라 그 시대 국가나 정부가 차세대 국민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이념이나 정신 혹은 이데올로기가 함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교과서의 저작이나 편찬은 국정이든 검정인이든 어떤 형태로든 교육관련 정부 기관과 무관하지는 않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은 역사적 사실의 왜곡만이 아니라 그런 왜곡을 요구하는 일본의 변화를 보는 안목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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