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 3
에라스무스는 루터(M. Luther, 1483-1546)보다 약 20년 연상이었다. 따라서 루터는 원튼 원치 않든 에라스무스의 사상가적 유산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격언집>, <우신예찬>, 특히 헬라어 신약성경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루터는 그가 1517년 95개조를 게시하기 6개월 전에 에라스무스에 대하여 쓴 글에서 “그는 하나님 보다는 인간을 더 고려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그가 에라스무스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루터가 95개조를 게시했을 때 에라스무스는 원칙적으로 루터의 논제를 지지했다. 그는 이 95개조 사본을 잉글랜드의 친구인 토마스 모어와 존 콜렛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과격한 어조에 경계심을 드러냈다. 에라스무스가 염려한 것은 휴머니즘 그 자체, 학문의 부흥, 문예운동이 이로 인해 위협받게 될 것을 우려했다. 95개조를 발표한 루터에게 있어서는 가능한 많은 지원세력을 얻는 일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에라스무스에게 편지를 보내고 지지를 호소했으나 에라스무스의 대답은 냉담했다.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썼다.
......당신의 책들이 이곳 루뼁에서 얼마나 큰 소동을 일으키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당신의 저작들이 나의 후원으로 쓰여졌다고 하고, 내가 당신 파의 지도자라고 하는 등 나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 나는 그들에게 증언하기를 나는 당신을 전혀 알지 못하며 나는 당신의 책을 읽은 적도 없고 당신의 주장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 나는 중립을 지킬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학문의 부흥에 기여할 것입니다. 나는 과격한 언동보다는 정중한 중용을 지킴으로서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중용을 원했다. 루터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도 원치 않았지만 동시에 루터가 온건한 태도를 취하기를 원했다. 루터는 95개조에서 면죄부를 판매하는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히트(Albrecht von Brandenburg, 1490-1545)를 공격했는데, 에라스무스는 이 알브레히트에게 진정서를 보내 루터의 안전을 지켜줄 것을 요구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교회비판이 옳다고 믿었지만, 그것이 실패할 경우 휴머니스트들이 성취하고 의도했던 것마저도 무위로 돌아갈 위험을 경계했다.
1517년 시작된 독일에서의 개혁은 유럽에서 논쟁의 핵으로 떠올랐다. 루터는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작센의 프레드리히 3세(Friedrich III, 1463-1525)는 보름스를 떠나는 루터를 납치하여 보호해 주었다. 루터가 바트부르크성에 숨어 있는 동안 루터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을 만큼 프레드리히는 루터를 비밀히 지켜 주었다. 그는 1502년 비텐베르크대학을 설립했던 사람으로서 루터의 진정한 후견인이었다.
이제 루터를 공개적으로 공격하거나 비판하지 않으면 루터의 편으로 간주되는 상황이었다. 에라스무스도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루뼁대학은 에라스무스에게 어정쩡한 태도를 비난했다. 루터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는 에라스무스에게 루터를 지지하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고, 교황과 황제의 칙령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에라스무스가 루터 편에 서지 않는 것은 그의 기질만이 아니었다. 점차 그는 루터의 입장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가 독일의 민족주의에 편승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의 불관용적이 태도는 동의할 수 없었다. 또 루터는 다소 과격한 인물이며, 휴머니스트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루터의 자유의지(free will)관에 대해 동의할 수 없었다. 루터는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휴머니즘의 인간관을 수용하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이 에라스무스에게 루터를 공격하도록 주문했을 때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이점을 공격의 주제로 삼았다. 즉 에라스무스는 1524년 <자유의지>(De libero arbitrio)라는 책을 써서 루터의 주장에 반박했다. 즉 루터가 엄격하게 따르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예정설은 인간을 신의 영원한 포로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또 루터가 말하는 인간의지의 전적 무능은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오직 은혜’(sola gratia)나 ‘오직 믿음’(sola fide)을 주장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약해지고 악을 행하게 하는 위험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이에 대해 루터는 <노예의지론>(The Bondage of Will)을 써서 답변했다. 인간 자신의 의지는 공허한 것이고, 영원불변한 하나님 앞에서는 무력하다고 주장하고 에라스무스의 <자유 의지론>을 반박했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음이 분명해졌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에게 자신의 <노예의지론>한권과 함께 편지를 써서 에라스무스에게 보냈는데, 편지를 받은 에라스무스는 오늘 우리가 보기에도 격할 정도로 상한 감정을 드러냈다. 두 사람의 결별이었다.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 만족을 주지 못했다. 도리어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쯔빙글리 같은 이를 부화시킨 알을 낳은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에라스무스는 “나는 달걀을 낳았으나 루터는 다른 새의 알을 부화했다”고 항변했으나 자신에 대한 변호로는 부족했다. 그의 <우신예찬>은 금서가 되었고, 그가 쓴 신약성경에 대한 글 중 불온하다는 판정을 받은 부분은 삭제 당했다. 더 고통스런 일은 그가 트렌트공의회에서 ‘불경스런 이교도’라는 이름으로 정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적대적인 두 진영 어느 쪽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의 자유주의, 관용 등의 가치관은 거절당했다. 독단과 불관용의 시대에서 보편적 자유주의와 관용은 설 자리가 없는 법이다.
에라스무스는 그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인문주의자로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았던 신학자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는 에라스무스를 가리켜, ‘최상과 최대’(optimum et maximum)라는 라틴어로 칭송했다. 사람들은 그를 ‘학문의 군주,’ ‘세상의 빛,’ 혹은 ‘비견할 수 없는 인간이자 불멸의 박사’(vir incomparabilis et doctorum phoenix), 라고 불렀고, 어떤 이들은 그를 ‘만물 박사’라고 불렀다. 이런 점은 에라스무스가 문화와 학문과 세상사와 유럽 정신사에서 부정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국의 헨리 8세는 그를 영국으로,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나트는 그를 빈으로, 프란소와1세는 그를 파리로 데려가고자 했고, 신성로마제국의 칼 5세는 그에게 자문위원의 자리를 제공했다. 네델란드, 벨기에, 헝가리, 폴란드, 포르투갈은 그에게 유혹적인 제안을 했고, 5개 대학이 그에게 교수직을 제안했다. 또 3명의 교황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던 일은 에라스무스 외에는 그 누구도 누리지 못한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 영광도 잠깐이었다. 그 영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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