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 2
에라스무스는 화란에서 출생했으나 그의 정신은 코스모폴리탄적인 것이었다. 그의 휴머니즘 정신은 한마디로 말하면 ‘자유’ 정신이었다. 그는 어떤 독단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절대시하지 않았다. 그는 사상적으로 편협한 교조주의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신과 다름에도 관용하는 아량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기는 신구교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된 시기였고, 중립지대는 없었다. 이런 현실에서 에라스무스의 관용적인 태도는 불관용적 독단 앞에서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 점은 그의 사상이 보다 보편적이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는 15세기 말 로틀뎀에서 태어나 로마 카토릭의 울타리 안에서 살았으나 그의 정신은 꼭 그 한계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 사람은 그를 코스모폴리탄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휴머니즘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인문주의(humanism)가 헬라 라틴 고전의 부흥을 희구했듯이 에라스무스는 로마의 고전 작가들의 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신학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성경이나 교부문서에 의존했듯이 인문주의자들은 이교적인 고전에 의존했다.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이 신앙과 삶의 표준이었듯이 인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헬라와 로마의 고전들은 인간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최고의 이상으로 간주되었다.
인문주의는 꼭 고전 혹은 고전 문학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것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하나의 지적 운동이었다. 특히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 위에서 새로운 가치를 내세웠다. 이들은 금욕주의나 수도원적인 삶만을 보다 고상하고 가치 있는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육체를 악한 것이라 하여 경시하지 않았고,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죄악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인간의 육체와 욕망을 숨기거나 억압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었다. 라파엘로(Raffaello, 1483-1520)의 작품에 나타난 육체의 아름다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의 작품에 나타난 인간의 근육에 대한 서정적인 터치는 이전시대에는 생각 할 수 없는 변화였다. 이 시대는 마리아의 가슴을 그림으로서 그 이전시대의 금기를 깼다. 미술에서만이 아니라 조각품에서 비너스의 ‘여신상’(女身像)은 여성의 육체를 형상화한 것으로서 이 전시대와는 달라진 한 시대의 가치를 반영했다. 한시대의 변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는 것이 미술인데, 그 시대의 미술과 조각품은 시대의 변화를 반영했다.
문학에 있어서도 동일했다. 한 때 교황의 비서였던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6-1457)는 ‘참된 선으로서의 쾌락’(Pleasure as the True Good)을 썼는데, 이제 쾌락은 정죄되거나 속박되어야 할 금욕의 적이 아니었다. 휴머니스트들은 그리이스적 미덕과 그리스도교적인 미덕이 동일한 것임을 드러내고자 했다. 말하자면 보다 보편적인 인간상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휴머니즘은 중세교회의 수도원적이고 금욕적인 미덕을 공격했는데, 이런 것들은 기독교의 참다운 정신에 인위적으로 덧붙여진 잘못된 교리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였다.
이런 취지에서 쓰여진 작품이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이었다. 이 책은 에라스무스가 영국을 방문하고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의 집에 기거하면서 일주일 만에 쓴 작품인데, 토마스 모어의 환대에 감사를 표하는 뜻에서 ‘모어’라는 이름의 동음이의적인 익살을 덧붙여 책의 제목을 Moriae Encomium 이라고 붙였다. 이 책은 1511년 출판되었고 각지의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수도원적 미덕이라는 주제를 신랄하게 풍자한 이 책에서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방종과 폐습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야유를 보냈다. 폐습에 대한 비판은 원칙문제에 깊이 관여하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항상 매혹적인 피난처였다. 에라스무스는 미신을 조롱하고 본질에서 벗어난 폐습을 공격했다. 이 책으로 에라스무스는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부패에 대해 장난스럽게 풍자했으나, 다음 시기 루터는 정색을 하고 이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했다. 루터에게 있어서 부패는 부수적인 것이 아닌 로마 가톨릭 교회 구조 자체에서 비롯된 본질적인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인문주의 운동은 종교개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들의 고전에 대한 연구는 자연스럽게 역사학과 언어학 연구를 촉진하였고, 고전어 연구는 성경연구를 촉진하여 그 동안 무비판적으로 받아드려 오던 소위 진리라고 믿어 왔던 것들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당시 교회의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은 종교적 폐습을 비판했으나 근본적으로 종교 운동이 아니었다. 비록 종교운동은 아니었으나 중세교회에 대한 신뢰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교회 개혁은 가능했다. 이렇게 볼 때 에라스무스가 1511년에 쓴 ‘우신예찬’은 6년 후 몰아칠 거대한 폭풍을 예견이나 하듯 나지막한 경고였던 샘이다.
에라스무스에 있어서 중요한 한가지 공헌은 헬라어 신약성경의 편찬이었다. 에라스무스는 1499년 잉글랜드를 방문했는데, 이 여행은 그의 생애에 커다란 변화를 안겨 주었다. 그는 영국에서 토마스 모어, 존 콜렛 등 인문주의자들을 만났는데,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고전 정신의 구현이라고 믿게 되었다. 고전에서 자유롭고 인간적인 이상을 갈구했던 에라스무스는 고전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정수를 표현하고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 그는 고전과 그리스도교의 융합을 필생의 과제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고전은 ‘자연(自然)의 복음’이었다. 키케로(Cicero, BC106-43AD)의 작품을 읽고 그는 이렇게 썼다. “이 글은 한 이교도가 다른 이교도에게 쓴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도덕적인 원리는 정의, 고결, 진실, 자연에 대한 성실 등이며 그 안에는 거짓이나 경솔함이 전혀없다. ..... 나는 이러한 위대한 인물들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성 소크라테스’여 나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까지 에라스무스는 헬라어를 알지 못했다. 그가 파리로 돌아가자마자 헬라어 공부에 몰두했다. 이 때 그는 34세였다. “아무리 라틴어 지식이 풍부해도 헬라어를 알지 못하면 불구의 신세라는 사실을 느끼고” 3년만에 헬라어를 독파했다. 이제 그는 고대의 저술들을 번역하고 편집하고 대중화하는 일에 몰두한다. 1500년에 출판된 ‘격언집’은 라틴어고전에서 추려낸 800여 종의 격언을 수록했었으나, 후에는 3000여 가지 격언을 수록했는데 상당한 부분은 그리이스 고전에서도 인용한 것이었다. 그는 아리스토테레스, 유리피데스, 플타르크, 세네카 등의 저술을 번역했고, 9권으로 된 성 제롬(Jerome, c. 347-419/420), 어거스틴(354-430)의 저작집 등 교부들의 문헌을 편집 출간했다. 제롬은 그리이스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는데 이 성경을 벌게이트판 성경(Vulgate)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런 성경번역 때문에 에라스무스는 제롬을 주목했다.
이런 고전 편찬 작업과 함께 에라스무스가 남긴 주요한 공헌은 1516년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집한 일이다. 이 성경은 헬라어와 라틴어 대역(對譯)으로 편집되었는데, 한쪽에는 헬라어 원문이, 다른 쪽에는 자신이 번역한 라틴어 역문이 있었다. 이 라틴어 번역은 제롬의 그것과 크게 달랐다. 에라스무스는 서문에서, “모든 성경이 전 세계의 여러 말로 번역되고, 시골 농부와 배 짜는 아낙내가 그리고 여행객이 성경 읽기로 지루함을 달래길 바란다”고 썼는데, 이로부터 꼭 6년 후 루터는 신약을 일상의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서 에라스무스의 이상을 성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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