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
인생은 만남이다. 젊은 안연(顔淵)은 공자(孔子)를 만나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청년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만나 정치가의 길을 버리고 철학자가 되었고, 율곡은 퇴계를 만나 조선의 유학 거봉이 되었고, 삼중고의 헬렌켈러는 설리번 선생을 만나 어둠에서 절망하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이들 모두는 도덕적, 윤리적, 철학적, 학문적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린 위대한 사람들로서 이들의 만남은 아름다운 만남으로 역사에 그 기록을 남겼다.
엘리야와 사르밧 여인의 만남, 엘리사와 수넴 여인의 만남, 바울과 루디아의 만남, 엘리야와 엘리사의 만남,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은 생명이 있고 삶의 숨결이 있는 만남이지만, 아합과 이세벨의 만남, 삼손과 들릴라의 만남, 발람과 발락의 만남, 가룟 유다와 제사장의 만남은 아픔의 만남이며 비극의 만남이다.
누구에게나 만남의 의미는 다양하겠지만, 나에게도 만남의 아픔과 기쁨이 있다. 아픔의 만남이야 누구나 자신의 가슴에 묻어두고 세월을 보내야 할 삶의 한 자락이지만 기쁨의 만남은 두고두고 행복을 창출하는 솟는 샘물이 된다. 35년 목회를 내리면서 숱한 만남이 생각난다. 돌아보면 나의 목회 현장에서도 그것은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인간은 삶을 통해 인생을 그림처럼 그리며 오늘을 살아간다.
오래전, 영남교사 교육대회 강사로 헌신하면서 전한 마지막 강의 내용이 “지금 가르치는 교회학교 학생들이 후일 성장하여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인해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습니다.’ 라고 여러분 앞에 고백하며 서는 그 날을 바라보면서 교사의 직임을 다하라”는 내용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내려왔을 때 현관에는 나를 기다리는 부부가 있었다. 믿음의 아들과 딸이라 생각하며 오늘에 이른, 서울에서 목회하고 있는 김 목사 내외였다. 습관처럼 덥석 내 품에 안았을 때 전과는 다른 느낌이 마음에 전달되었다. 품엔 안긴 김 목사의 눈은 충혈되어 젖어갔다. 교회로 돌아와 목양실에서 마주앉았을 때 내 앞에 한 권의 논문집을 내놓고 눈시울을 붉히는 김 목사의 이야기는 기쁜 소식이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고 논문집이 출판되자 말자 그것을 품에 안고 그렇게 달려온 것이다.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김 목사를 아는 내게는 심령 폐부에서 감정이 치솟아 결국 아이들 앞에서 나는 너무 감사해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내 품에 안으면서 우리는 한참 그렇게 울었다.
가난과 아픔이 있어서 그의 삶은 눈물이 음료가 되었지만, 그 눈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의 아픔을 씻어줄 수 있는 목회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배움이 한이 되어 뒤늦게 대학을 다니고 석·박사 학위과정을 마무리한 향학열이 그의 목회의 폭을 넓히고 높이는 힘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있어서 그들은 항상 물가에 세워둔 어린아이 같이 느껴졌었는데,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오늘에 이르러 지난 세월을 돌아볼 때 새삼 목이 메이는지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이 있기까지는 전적 목사님의 사랑과 인도하심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사랑은 무엇으로 비교할 수 없지만, 아내가 목사님 양복 한 벌 꼭 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오랫동안 준비한 마음이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고 울먹이는 김 목사에게 내가 입을 연 첫 마디가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었다.
‘청출어람 청어람’은 성악설(性惡說)의 창시자 순자(荀子)의 권학편(勸學篇)에 나오는 한 구절로, ‘청색은 남색에서 나왔지만 남색보다 푸르다’는 뜻으로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렇다. 나는 김 목사가 나보다 학문적으로 목회적으로 더 훌륭한 행보를 하기를 소망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내가 이것이라고 딱 부러지게 가르친 것은 없지만 그는 오늘에 이르도록 나의 가르침으로 자신이 오늘에 이르렀다 했으니 나의 바람은 청출어람 청어람의 아들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내 가슴에 기쁨이 강물이 되었다.
이제 나는 은퇴를 했다. 그리고 교회로부터 과분한 원로목사로 추대받고 노회로부터 몸 둘 바 모를 공로목사로 추대를 받았다.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 물을지 모르지만 그 직분이 나의 삶이고 목회였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더없는 영광스러운 명예다. 이제는 원로(元老)라는 새로운 이름값을 하며 새로운 역사를 쓰려고 더욱 엎드리면서 더욱 엎드려 기도하는 제목이 하나 있다. 청출어람 청어람이 우리교회에 역사화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너무도 훌륭하신 후임 목사님이 부임하셨다. 나와 후임 목사님의 관계가 부자지정(父子之情)으로 포항중앙교회가 목회적으로 청출어람 청어람 이기를 기도한다. 나보다 더 좋은 목사로, 나보다 더 행복하고, 나보다 더 평안한 목회가 되어 나보다 더 주님이 기뻐하시는 목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포항중앙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목회적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떠난 자리가 맑고 아름다워야 한다. 쓰레기가 남게 되는 떠난 자리는 비극이며 오욕이다. 떠난 자리가 아름다운 목회, 떠난 자리를 아름답게 다듬어 주는 목회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평행감축(平幸感祝)의 교회이기를 기도한다. 그것은 목사의 몫이기도 하지만 성도들의 몫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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