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단상(斷想)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주일로 시작되는 5월은 행복이라는 단어가 먼저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그러고 보면 가정이라는 곳보다 더 행복한 곳이 있을까 새삼 생각해 본다. 어느 해 무론하고 5월이 되면 교회도 다양한 행사로 분주하다. 어린이주일의 감동에 이어 어버이주일의 사랑, 청년주일의 희망과 가정주일의 행복은 5월의 축복이다.
특히 어버이주일이 되면 부모공경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를 다짐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더욱 믿음으로 양육하고자 다짐하기도 한다. 어버이 주일이면 ‘어머니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는데, 나는 지난 어버이 주일에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인터넷에서 유행되고 있는 아버지의 유형이 있다.
첫째는 ‘엄마형 아버지(Mr. Mom)’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어머니가 해온 집안일들을 아버지가 떠맡는 것을 아버지의 역할로 인식하는 경우다. 둘째는 ‘돈 지갑형 아버지(Mr. Money Bags)’가 있다. 이는 아버지의 역할을 우선적으로 재정적인 면에서 인식하는 경우다. 셋째는 ‘방관자형 아버지’인데, 이는 아버지의 권위는 있으되 허세를 부리면서 자녀에게 실질적으로 무관심한 경우다. 넷째는 ‘건축가형 아버지’이다. 이는 아이를 자신의 어린 시절과 똑같이 되도록 키우는 것이야말로 아버지의 일이라고 믿는 경우다. 다섯째는 ‘농부형 아버지‘가 있다. 자녀들이 잘 자라도록 물을 주고 영양분도 줄 뿐만 아니라 잡초를 제거해 주는 사명을 수행하는 경우다. 말할 것도 없이 농부형 아버지가 훌륭한 자식을 양육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농부형 아버지가 좋다는 것은 알면서도 정작 좋은 농부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아버지들의 약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해 보이는 아버지의 여러 모습 속에서도 공통된 것이 있으니, 다름 아닌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것이다.
이 시대를 가리켜 ‘아버지가 우는 시대’라고 한다. 1997년 IMF 사태가 터지면서 명예퇴직이라는 찬바람을 타고 김정현 씨의 소설 ‘아버지’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00년 구조조정의 광풍을 타고 조창인씨의 소설 ‘가시고기’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몇 년 동안 ‘아버지 신드롬’이 일어났다. 2002년 9월부터 인터넷을 통해 퍼지기 시작한 작자 미상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는 오늘 우리의 가슴을 새삼 후리는 아픔이 되고 있다. 이 모두는 아버지의 실상을 그려낸 글들이다. 그리고 지금도 아버지의 모습은 벌판에 홀로 선 듯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오래 전에 아부지 닷컴(http://www.abuji.com)에 올려지면서 가슴을 싸하게 만들었던, ‘가정에 어른이 없다’라는 글이 생각난다.
<나이 드신 어른이 아들집에 다니러 갔다가 며칠 묵는 동안에 집안의 상황을 살펴보니, 그 집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손자이고, 두 번째는 며느리이고, 세 번째가 가장인 아들, 네 번째는 애완용 개, 다섯 번째는 식모이고, 자신은 마지막 여섯 번째인 것을 느끼고 가장인 아들에게 “3등 애비야, 잘 있어라. 6등은 간다.”고 하면서 집을 나왔다고 한다. 요즘세태를 풍자해 지어낸 이야기 일수도 있지만, 물질만능에 찌들어 가는 후손들에게 어른들이 꼭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너희도 곧 늙는단다. 몸이 늙었다고 사리판단도 못하는 건 아니지…”>
오늘의 아버지는 이래저래 힘들고 어렵다. 분명한 것은 아버지의 권위가 추락하면 가정도 사회도 국가의 위상도 추락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계속 추락해서는 안 되는 것이 또한 아버지의 위상이다. 아버지의 권위가 세워져야 하고 아버지의 어깨가 쳐지면 안 된다. 아버지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아버지들의 몫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세대를 높여주는 가족과 다음세대의 몫이기도 하다.
어느 자식 무론하고 ‘어머니’ 하면 따뜻한 감정이 솟구치지만, ‘아버지’ 하면 늘 어렵게만 느껴지는 존재가 아버지다. 그러나 내 아들 내 딸의 삶을 위해 말없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존재 또한 아버지다. 그래서 아버지의 걸음을 우보(牛步)라고 한다. 소처럼 말없이 가는 걸음, 힘들고 고달파도 한 마디 말없이 걸어가는 아버지의 생각은 오직 자식뿐이다. 표현력에 있어서 어머니보다는 못하기에 자식들 마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오해의 잔뿌리가 늘 남아 있다. 그래도 아버지가 아버지의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것은, 잘났든 못났든 남편을 끝까지 한 집안의 아버지로서 자리를 지키게 해준 아내, 곧 자식들의 어머니의 내조가 있기 때문임을 아버지들은 잘 안다. 남편으로 하여금 아버지 권위를 세워주는 소리 없는 아내의 사랑처럼, 이제는 자식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드릴 수 있는 진정한 효심(孝心)으로 인하여 오늘의 아버지 어깨가 처지지 않고 힘 있게 해야 한다.
5월을 맞으면서 다시 한 번 오늘의 아버지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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