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30년을 맞으면서
감사의 계절을 맞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넉넉함을 갖는다. 어느 계절보다 마음 마음이 풍성함으로 출렁이며, 보이는 것 모두가 충만으로 느껴지는 때가 바로 가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기도 하다. 무릇 사람이란 책 읽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삶을 알아가는 법이기에, 지혜로운 사람은 책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고 책을 읽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목회를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도록 수많은 책들을 접하였지만, 가을이 되면 특히 생각나는 책이 있다. 바로 David Hansen 목사님의 저서 ‘The Art of Pastoring‘인데, 목회자로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책이었다. 이 책을 통해 목회는 ‘방법이 아니라 삶’이란 것을 깨달으면서 서점에서 수없이 뽑아 들었던 다양한 목회 방법론 서적들을 놓기 시작했고, 많은 말을 나열하기보다는 하나의 행동을 통하여 목회를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어려운 용어를 해석하려고 원서와 주석을 펴는 시간보다는 엎드려 무릎 꿇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목회가 무엇인지를 느끼기 시작하게 되니 벌써 이순이 넘어서 버리고 성역 30년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성역(聖役)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지도자는 그릇이 커야하고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넉넉한 인격이 요구된다. 하지만 대부분 작은 일들에 열을 올리고 아무 것도 아닌 일들로 스스로 무너지는 일에 익숙했던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스스로의 모습이 왜 그렇게 초라하고 못나 보이는지 이제야 겨우 느껴지는 것 같아 성의(聖衣)도 벗겨진 듯한 영적 추위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풍요롭던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는 이즈음에 넉넉함으로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하게 된다.
목회의 본질, 그것은 많은 교인을 자랑하는 것이 아님을, 수많은 예산을 자랑함도 아님을, 좋은 승용차를 몰고 사례비를 많이 받는 것도 아님을 안다. 상한 심령을 싸매 주고, 잘못된 길을 걷는 영혼을 바로잡아 주고, 고통 받는 영혼을 위로하고, 지친 심령에 소망을 주면서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고 주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목사의 목회이다. 그것은 목회자만이 아닌 그리스도인 모두의 몫이어야 한다. 아무 것도 아닌 일들로 다투고,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음에도 용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삶이 습관화된 모습으로는 결코 사회를 수용할 수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엎드릴 줄 아는 겸손과 낮아짐의 축복을 간증할 수 있고, 너를 위하여 나를 버릴 줄 아는 넉넉함이 있을 때 그는 천하를 품에 안을 수 있으며 땅에서도 천국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에 이르도록 일을 앞세우지 않았고 사람을 귀히 여기면서 목회 현장을 일구어 왔다. 일을 하다가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미련한 것은 없다. 그러기에 아직까지 목회 현장에서 큰 부딪힘 없이 오늘에 이르렀고, 교회는 부흥하고 평안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성역 30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돌아보니 목회를 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들만 생각나서 자괴심으로 무릎을 꿇는다.
예수님은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고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면서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던 백성들이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돌변할 때에도, 군중들의 조소와 배반에도, 무엇보다 그토록 사랑했던 가룟 유다의 배반의 입맞춤을 받으면서도 그 모든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예수님의 태산 같은 마음을 알아 보다 큰 그릇이 되는 것이 목회의 시작이 되어야 하는데, 성역 30년을 맞으면서 이제 다시 주님의 가르침이 뼈에 사무치도록 느껴지니 내 마음이 황량한 벌판에 선 듯해서 마음이 시리다.
마음에 좀 거슬린다고 그때마다 팔딱거리는 꼴뚜기처럼 쉽게 뛰는 입술과 행동이라면 거기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관용이 있어야 지도자가 될 수 있는데 나는? 우리는? 오늘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위의 것을 보고 아래 것을 보지 말라는 교훈도 잊어버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거의 없이 앞만 보고 달음질 하듯 살아가다보니, 실상을 놓치고 허상만 붙들고 헐떡거리는 모습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
모든 사람을 높여 생각하는 낮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형통하고 감사하는 사람이란, 때로는 힘들고 아프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한 것을 찾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풍요로운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으면서, 인생의 월동준비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생각하며 남은 사역 기간이라도 제대로 성역의 걸음을 행보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무릎을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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