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역전시킨, 부산을 역전시킬 김형수 목사


- 거듭된 유산 시도에도 건강히 태어나
- 청소년 시절, 고된 노동에 장애까지
- CTS부산지사장으로 문화선교, 방송선교에 앞장


■ 환영받지 못한 탄생

20세 꽃다운 나이에 어여쁜 처녀가 시집을 갔다. 과거에는 남편이 누구인지도 모른채 부모들끼리 정한 결혼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결혼식에서 본 남편은 병색이 짙어 보였다. 남편은 6.25 전쟁으로 군에서 생활하며 제때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못한 탓에 폐결핵이 걸렸는데 이 마저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제대한 후에야 알았다. 아픈 남편에, 시집살이에 고단한 시간을 보내며 이곳에서 벗어나 도망갈 생각만 했다. 그런데 임신을 한 것이다. 아기를 낳으면 정말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란 생각에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몸을 굴려보기도 하고, 양잿물을 마시기도 했다. 유산을 시키려 갖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962년 2월 17일 건강한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 그렇게 김형수 목사는 세상과 대면했다. 환영받지 못한 탄생, 실존하지 말아야 했던 사람. 그가 김형수 목사였다.
폐결핵을 앓던 아버지는 결국 9세의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비록 병든 아버지였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 없어지자 마치 울타리가 허물어진 것처럼 세상은 이들을 공격했다. 어머니의 뛰어난 미모에 동네 남성들은 호시탐탐 노렸다. 첩으로 들이겠다며 가족회의까지 하는 아저씨, 한밤 중 보쌈을 시도한 아저씨 등 김 목사에게 세상은 적이었다. 그래서 밤에 잠이 들 때면 몽둥이를 가슴에 품고 잤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지켜야하는 가장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도 힘들었겠지만 어머니는 오죽했을까? 캄캄하고 절망적이었던 그녀에게 예수만이 삶의 소망이었다. 과거 친척이 전해 준 복음으로 김 목사의 부모는 예수를 영접하고 이웃 동네에 있던 작은 교회에 출석했다. 그렇게 믿음 생활을 시작한 것이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됐다.


■ 전국을 떠돈 청소년 시절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결국 중학교 1학년 1학기를 끝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우연한 기회로 배를 타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어린 아들이 배를 타고 일하는 모습에 어머니는 기술이라도 배우길 바라는 마음으로 서울 외삼촌에게 아들을 맡겼다. 당시 의류공장을 하던 외삼촌은 누이의 간곡한 부탁에 김 목사를 데려오긴 했지만 15세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인이 운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게 됐고 매일 코피를 흘리게 되자 그만두고 이모가 있는 강원도 묵호로 가게 됐다. 유명한 무당이었던 이모 집에 머물며 영적전쟁이 무엇인지 경험했고 우상이 둘러싼 환경에서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다. 이모 집에 기거하며 근처 철공소에서 일을 했는데 일하던 중 용접 불순물이 눈에 튀어 실명의 위기를 겪었으나 기도의 응답으로 눈은 실명되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기도하며 고민하던 어머니는 부산에 있는 작은 아버지에게 연락을 하고 부산에 있는 철공소에서 일을 하게 됐다. 부산 충무동에 위치한 철공소에서 일할 때였다. 공장에서 밀링기계를 작동시키던 중 쇠를 깎는 기계에 왼손가락 두 개가 절단된 것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불안으로 세상이 캄캄하던 그 때, 김 목사의 나이 17세였다. ‘절망’이란 말이 무엇인지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김 목사는 이후에도 의류공장에서 옷을 짜는 일도 하고, 군납업체인 한국화이바 하청공장에서 공장장으로도 일했다. 직접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고, 핸드폰 판매를 하기도 했다. 15세부터 시작된 그의 고된 일들로 내성적이던 성격도 바뀌었고, 술과 담배를 달고 살았다. 청소년 시절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했지만, 김형수 목사는 집이 아닌 친척집과 공장에서 머물렀고 장애를 입는 등 혹독한 연단의 시기를 거쳐야 했다.
김 목사는 핸드폰 판매를 적극적으로 했다. 앉아서 기다리기 보다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며 영업에 매진했다. 그 결과 한강이남 핸드폰 판매 최고의 실적을 갖게 됐다. 그로 인해 부(富)도 축적할 수 있었다.


■ 믿음을 회복하게 된 결혼

과거 공장에서 일할 때 한 여자를 만났고 연애를 하며 결혼을 약속하게 됐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는 불교 보살로, 불교에 독실한 신도였다. 불교의 영향으로 자란 그녀 역시 데이트 중 절에 찾아가 기도할만큼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런 그녀가 김 목사에게 불교로 개종하길 권유했고, 아무리 방황 중이었다 해도 개종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김 목사가 그녀에게 기독교로 개종하길 권유했고 이를 받아들여 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결혼을 하고 교회에 함께 출석했다. 아내를 개종시켜놓고 김 목사가 대충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먼저 본을 보이고자 열심히 신앙생활하며 교회 공예배를 빼놓지 않고 출석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했다. 신앙이 회복되니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세상에 대한 증오로 가득했던 마음이 하나님을 통해 씻겨지는 듯 했다. 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보니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너무 아름다웠다.
그리고 중단했던 학업도 다시 시작했다. 검정고시 7년, 경성대 신학과, 부산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했다. 학업을 마치는데도 20여년이 걸렸다.


■ 부산 복음화를 위해

사업이 잘 돼 IMF 때 빌딩을 건축하게 됐다. 부산시 수영구 망미동에 지하 1층, 지상 7층 규모의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착공예배를 가지며, “한 층은 하나님을 위해 드리겠다”고 말했다. 당시 김 목사는 교회가 개척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아내가 우연히 극동방송을 듣던 중 창원극동방송 부산스튜디오가 필요하다는 광고를 듣게 됐고 결국 2001년 10월 입주해 7년간 무상으로 임대해 줬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부교역자로 5년간 섬긴 후 지인의 초청으로 중국 우루무치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곳에서 비즈니스 선교를 하겠다는 인간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다. 교회를 사임한지 이틀 후 지인으로부터 CTS기독교방송에서 사역하라는 제안을 받고 기도하던 중 ‘너의 선교지는 중국이 아닌 부산이다’는 음성을 들었다. 증거가 되듯이 우루무치에 폭설이 내려 3개월간 비행기 운항이 안된다는 연락도 받았다. 그렇게 CTS부산지사장으로 섬기게 됐다.
김형수 목사는 부산에 기독문화센터가 마련되길 기도하고 있다. 김 목사는 “시민회관, 문화회관에서는 종교행사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2~3만평의 부지에 전시장, 박물관, 교육시설이 세워진 기독교 랜드마크가 조성되길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칠흑 같이 어두운 인생을 환한 빛같이 역전시킨 김형수 목사는, 이제 부산을 영적으로 역전시키기 위해 달리고 있다.

오혜진 기자

201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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