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꿈이 60년만에 이루어 지다
“나는 오래 전 부터 푸른 꿈과 함께 살아오면서 소싯적 시절엔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고 청소년 시절엔 목회자가 되는 것이 이상이었으며, 나이들어 어느덧 노년 인생을 되돌아볼때쯤은 문인이 되는 것이 마지막 소망이었다“고 진솔한 그의 삶의 고백을 했다.
선생님과 목회자가 되지 않더라도 만학으로 사회 정치지도자의 길을 걸어 정치학 박사로 지방군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신앙의 삶속에는 장로로서 최고의 영광인 장로 노회장을 역임했고, 이젠 70세 정년을 앞두고 시인이자, 수필가로 문인의 경지까지 달성한 풍요로운 소망을 이뤄낸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시무장로 33년째 되는 양한석 장로(문현중앙교회, 69세).
늦게 글을 쓰게된 동기를 묻자 “자신이 후회없이 살아온 인생여정을 글로 남길수 있는 것도 한 방편으로 생각이 되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하면 된다는 긍정의 힘을 후대에 보여주고 싶고, 낙심하는 자에게 용기를 주는 희망의 메세지가 글이 아니겠는가 싶어 5년전부터 준비하고 모아두었던 글을 통해 조용히 지나온 삶을 통해 돌아보면서 자신을 비워 낮아질때 아름다운 글이 나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남긴 글은 영원한 유산이기 때문에 진솔하게 영혼과의 대화를 한편의 시로 또는 수필로 쓰게 됐다“고 솔직한 동기를 이와같이 말했다.
기도의 행복
기도할 때가 가장 즐겁다
나를 의식하지 않고
나의 모든 것을 과장하지 않고
현재 그대로의 순수한 자아를
궁휼히 하나님께 내보일때
그때마다 가장 아름다운
나를 발견한다
현재의 나의 전부를
알고 계실 주님,
그 주님의 면전에서
모든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께 내 모든 것을 맡길때
오오, 이 평안한 향기로 오는 맑음
-중략-
꾸준히 생활주변이며 살아오는 여정에서 메모하며 가꾸어 온 시 100여편 가운데 푸른 꿈과의 동행(1부), 제2부는 나를 사랑하기, 제3부는 길의 의미, 제4부 부부, 제5부 어떤 방황을 묶어 금년 2월초에 첫번째 시집을 발간했다. 시 중 일부를 한국문인계의 이름있는 계간 ‘문예운동‘지에 시부분을 등단,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어 월간 ‘문학세계‘ 수필부분을 등단함으로 문인이라는 타이틀을 받게 됐다.
#시의 작품세계 해설한 중진문인
한국문인계 한 분인 최장도 시인은 양한석 시인의 시세계 작품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총평했다. 시인은 목적의식에 따라 살아가면서 고통과 수난도 감수함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을 여기 인생을 서로 이해하고 협조하며,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 더불어 함께하는 동행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시는 세상을 폭넓게 관조하는 안목에 긴장성을 부여해서 좋다고 서평을 했다.
푸른 꿈과의 동행
함께 간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
우리가 한 시대의 역사를 살면서
인연을 나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내 마음을 일부나마
아무런 사심없이
그대와 함께 나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거룩한 축복인가
-중략-
#집안의 가문
충청북도 보은이란 작은 시골에서 자란 양한석 시인의 가문은 선조때는 일찍히 세종대왕의 큰 아들 문종의 스승이라할 만큼 지금의 문교부 장관 정승을 한 뼈대있는 한 학자의 집안이었다. 어릴때부터 시골 군 대표로 백일장에도 나가 출전을 해 본 경험이 있어 문학에 소질이 있어 보였다. 보은 시골은 속리산이 인접한 곳, 불교세가 강해 집안이 천석꾼으로 대농으로 하며 잘 살았다고 할까, 시골 군수나 원님이 부임하면 꼭 찾아 인사를 하러올 만큼 인정받았던 집안이었다. 할아버니는 도관찰사 격인 벼슬을 하여 부러울 것이 없었다. 양한석 시인의 어릴때는 키가 크고 기골이 장성하여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주위에서 그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게 한 도련님으로 통해 편하게 살았는데 어느땐가 집안 가세가 기울리게 되고 양한석 소년시절 선배가 교회나 나가보자고 권한 것이 처음으로 교회 출석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당시 보은마을에는 하나의 교회가 세워졌는데 미국 선교사가 1년에 두차례정도 와서 세례를 주곤 했다. 그때 선교사의 설교 말씀에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하면 능력주시는데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말씀에 용기를 얻어 부산으로 왔다. 충청도 촌놈이 아무런 가진 것 없이 맨땅에 시작하고 가난한 청소년을 지나면서 학교를 못다녀 배움이 한이 된 것이다. 그때부터 시작된 사업이 지금의 골판지(포장박스) 사업이었다. 40년간 줄곧 한 곳에 우물을 판 관계로 업계로부터 인정을 받아 지금은 법인이 두개, 약 7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중소기업가로 성공했다. 못다 이룬 학업을 검정고시로 고교 대학까지 거쳐온 것이 동의대학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만학에 가깝게 이룬 만학도였다. 부산 남구의회 초대의장을 역임하고 (주)SEP 대표이사로 부산노회 장로 노회장으로 기업가로 성공하고 정치계에 입문하여 지방 구의회 의장까지 이루었고 신앙적으로는 장로노회장까지 전국 64개 노회에서 300만 성도운동 부문에서 가장 자랑스런 노회장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한기총 평신도 지도 부서기로서 지방에서 처음으로 중앙무대에까지 인정받은 신앙인이다.
#평소 양한석 장로의 덕목은?
그는 1978년에 시무장로로서 새벽기도하러 새벽 4시에 일어난다. 문현중앙교회 새벽기도를 마치면 집에서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에 2시간 정도 글을 쓰게 된다. 마음과 영혼을 비운 자리에서 하나님께 경건한 기도를 드리며 말씀으로 묵상하게 되면 아름다운 시성이 나온다고 그는 이 시간이 가장 평온하다고 말했다.
그는 매사에 상대방이나 모임시 대화를 나눌때는 먼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공동체의 이익이 우선이 되고 그보다도 덕을 앞세우며 그보다 더 나은 상위개념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그이상 대화 종결로 결론을 짓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가(可)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31절)
이 성경말씀이 양한석 장로의 신앙의 좌우명이자 삶의 철학이라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아내 김광자 권사 사이에 2남 1녀가, 그 밑에 큰 손자 2명과 작은 손자 1명이 오손도손 할아버지, 할머니의 귀염을 독차지하고 있다.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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