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선교사 정신을 계승한 일신기독병원 이사장 정권섭 장로

임기 마치고 8월에 물러나, 빚진 마음으로 섬겨온 지난 세월들


일신기독병원은 1952년 설립돼 명실공히 산모, 출산 관련 진료에서 부산, 경남지역 최고의 병원으로 손꼽힌다. 최근 병원 내부 문제로 힘든 시기를 겪었으나 사건을 잘 마무리 짓고 수습단계에 들어간 재단법인 한호기독교선교회 제9대 이사장 정권섭 장로를 만났다.
정권섭 장로는 호주에서 신학을 배우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강도사로 교회에서 사역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일반대학의 길로 갔다.
그리고 호주선교회와의 인연으로 일신기독병원 이사회에 동참하게 됐는데, 이사장이 되기까지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오는 8월 퇴임을 앞둔 정권섭 장로를 만나 그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호주선교부의 도움으로 유학을 하고 신학을 공부했는데 왜 목회의 길로 가지 않고 일반대학 법학길로 갔는지?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변명이 되겠지만 사실 신학하고 와서 첫 사역지가 부산 성동교회였다. 당시 윤인구 목사님은 늘 한걸음 앞선 목회를 하셨기 때문에 윤 목사님의 목회 방향 등을 가까이에서 배우면서 ‘참 좋은 분을 만났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신나게 사역했었다. 그런데 목회를 하다보니 내가 했던 신학의 본질과 한국교회 풍토와 너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당시 부산의 양대 신학교였던 김길창 목사님의 부산신학교와 노회에서 운영하던 좌천동 부산신학교에 강의를 하러 이틀간 출강했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닷새동안 출근을 했었다. 연말 당회에서 저에게 ‘교회에 열심히 해 달라’, ‘외부 출강을 줄이고 교회에 전념해 달라’는 것은 교회이기 때문에 충분히 수긍이 가능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이 아니라 내게 조건을 제시했다. 18,000원 정도의 사례를 받고 있었는데 당시, 내년 강도사 사례를 파격적으로 인상해 줄테니 외부 강의를 그만두고 교회에 매일 출근해서 심방일지 작성과 교회 일에 매진할 것을 제시했다. 당시 난 외국에서 배운 지식을 후배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꽉 막혀있던 시절, 외국에서 배우고 온 사역자들이 부산에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사례금과 결부시켜 제시하다보니 나의 신앙, 신학 노선과는 맞지 않은 것 같아 ‘삯군으로 일하기 싫다’는 생각 때문에 거절하고 그해 마지막 날 사임하게 됐다. 이 일은 지금도 윤 목사님께 죄송한 마음이 크다.
그 후 윤 목사님께서 좌천동에 있던 노회가 직영하는 부산신학교 교장을 맡으시면서 같이 일하자는 권유를 했고, 이에 응해 1년간 강의를 했었다. 윤 목사님과 노회 관계가 힘들었는지 스튜어드(서두학) 선교사와 윤 목사님의 감정이 좋지 않아 서두학 선교사가 교장을 맡게 됐다. 그러면서 전 윤 목사님이 계시지 않는 학교에 머물러야할지 고민하던 중 부산대학에서 콜이 있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나를 불러줘 뜻하지 않은 자리로 가게 됐다. 만약 그 자리에 윤 목사님이 떠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부산대에서 부르지 않았다면 신학의 길로 갔을지도 모른다.
내가 부산대 기독학생회(KSCM) 회장을 맡으면서 전국 컨퍼런스를 부산대에서 개최했었다. 부산대 법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부산연세초급대 전임강사로 근무하다가 초급대가 가정대학으로 개편하면서 그 작업들을 맡게 됐다. 가정대학으로 개편하는 일을 마치고 나니 내가 맡을 과목이 마땅치 않아 호주로 가게 됐다.
기독학생회 회장을 하면서 전국 컨퍼런스를 하는데 자금이 어려워 선교사들을 만나 후원요청을 했었다. 그러면서 많은 선교사들을 만났는데 그 때 선교사들이 날 눈 여겨 보고 신학공부를 시키고자 말 했었다. 선교사들이 철수한 이후 호주에서 신학을 배운 한국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김정남 목사, 한화영 목사와 함께 초청을 받아 호주에서 훈련을 받았다. 호주 선교사 철수 이후 교단을 지킬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윤인구 박사와의 인연, 양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을만큼 가까웠는데...
윤 박사님도 처음에는 나를 학생으로, 신앙운동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었다. 윤 목사님이 소정교회를 세우고 대민봉사회를 세워 내게 와서 같이 도와달라고 했었다. 앞으로 대학교회를 세워야 하기 때문에 청년들을 맡아 대학사역을 하자고 하셨다. 국립대인 부산대 내에는 교회를 세우지 못해도 근처에 교회를 세워 직원들과 학생들이 예배할 수 있게 마련해야 한다며 교회를 세운 것이 소정교회다. 그래서 학생의 신분으로 소정교회에 가게 되어 기숙사의 일도 맡고 학생들의 신앙을 돌보면서 학생신앙운동의 중심지로 사역하게 됐다. 부산대 예전 중강당, 현재 제2별관이라는 박물관이 석조건물인데 그곳을 올라가 보면 중강당이 교회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곳에서 매일 찬양하며 기독교 특강, 모임을 가졌다. 속칭 국립대 내 대학교회로서 자리를 잡았으며 당시만 해도 기독교대학과 같은 역할을 했었다. 입학식, 성탄절, 졸업식 때마다 교회에 출석하는 기독학생들이 특송을 맡아 했었기 때문에 기독교학교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윤 목사님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나를 재목으로 생각하셔서 사용하시려고 그 분이 친 자식 못지않게 사랑해주셨다. 이것이 외부에 양아들이라는 소문이 난 배경이었다.

일신기독병원과 어떻게 첫 관계를 맺게 됐는지?
한국인 원장으로 이흥주 원장이 당시 부원장으로 맥켄지 선교사와 함께 선교마인드를 갖고 일신기독병원을 시작했다. 일신기독병원이 영세민들에게 무료진료를 하면서 당시 경남여고 뒤 수정산 언덕이 피난민 판자촌이었는데 그곳을 자주 방문했다. 이흥주 원장은 내가 대학 2학년 때 그곳에 교회를 세울테니 학생이지만 전도사로 사역을 해달라고 부탁해 천막으로 교회를 지어 사역하게 된 것이 지금의 수정교회다.

일신기독병원 이사장이 된 계기
처음에는 감사로, 이사로 섬기게 되었다. 당시 호주 선교사들이 서서히 철수하던 시기였는데 그 때 감사로 섬겨달라고 해서 감사로 섬기다가 그분들이 철수하면서 이사로 섬기게 되었다. 당시 이사회는 선교회 이사 3명, 일반인 이사 3명, 통합측 이사 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선교회 이사가 한 명 빠지면서 추천을 받아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함께 했던 선교회 이사는 언더우드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 왓슨 선교사, 그리고 제가 선교회 이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돌아가시고 왓슨 선교사가 본국으로 돌아가서 이젠 나 혼자만 남은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일신기독병원 이사회에 몸담게 되었다. 이사장이 된 것은 이사를 오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게 순서가 돌아왔을 뿐이다.

호주선교회가 철수하면서 병원을 통합측에 귀속시킨다거나 아니면 독립적인 재단으로 둔다던지 어떤 의견이 없었습니까?
없었다. 다만 우리 정관에 앞으로 재단이 해산될 때, 총회 결의를 받아서 동일 혹은 유사한 목적의 재단에 기증한다는 조항이 있다. 만약 이런 조항이 없다면 국가에 귀속되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호주 선교회에서 이 병원을 세운 것이 아니다. 물론 호주선교회와 연관은 있으나 닥터 맥켄지 선교사가 파송받은 것은 선교회가 아니라 호주 여전도회에서 파송을 받아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호주 여전도회에서 자금을 모아 전쟁으로 힘든 한국을 돕기 위해 맥켄지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후 맥켄지 선교사가 간접적으로 선교사로서 선교회의 지원을 받았으나 선교회에서 이 병원을 세운 것은 아니다. 재단법인 한국호주선교회가 되다보니 호주 선교회에서 시행하는 4가지 사업 중 하나로서 의료사업으로 편입된 것이다. 4가지 사업 중 하나이지 법인 직속이 아니다. 내가 호주에 있을 때에도 보았지만 호주 여전도회에서 바자회 같은 것을 해서 기금을 모아 일신기독병원을 지원했다. 옷, 물건 등 다양한 물품을 모으고 산모들이 사용하는 것, 갓 태어난 아기들이 입는 옷, 물품 등을 여전도회에서 모아 지원해 줬다.
호주 선교회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호주 장로교회 여전도회에서 파송, 후원한 것이다.

이사장으로 9년 동안 섬기면서 힘든 점과 보람은?
나는 빚진 사람일 뿐이다. 그저 호주 선교회에 진 빚을 이것을 통해 갚으려고 했을 뿐이다. 힘든 점은 호주 선교사들이 철수하면서 ‘네가 해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법인 내 이사로서 세워놓고 갔었다. 선교회 대표로 세워놓고 갔을 뿐, 아무런 정리가 되지 않아 힘들었다. 또 하나 힘든 것은 당시 맥켄지가 설립자로서 오너였다. 그가 후원을 받아 운영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이 병원 전체의 뜻이었다. 그래서 원장 중심의 병원이고 이사회라고 하는 것은 그저 격을 맞춰주는 것이었다. 이사회는 그저 회의가 있다고 하면 참석하는 것, 원장이 안건을 내놓으면 그저 좋다고 박수쳐주는 정도였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다보니 중간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마치 식물이사회와 같았다.

대담_본사 사장 신이건 장로
정리_오혜진 기자


대담을 마치고
정권섭 장로를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년전 부산 성동교회 강도사 시절 젊은 30대 패기만만한 신학도로서 해외 유학파 강도사에게 젊은 해양대학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당시 유형심 담임목사 역시 일본 도쿄 신학대학에 유학한 엘리트 목사여서 부산 교계가 이 교회를 주목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법학도로서 후학을 위해 평생을 대학강단에 섰던 정권섭 장로는 그가 은혜 입었던 호주 선교부에 진 빚을 갚는 심정으로 무너져가는 일신기독병원을, 모자보건센터를 세우고 이사회의 기능을 회복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선교의 사명을 다 마친 사도 바울과 같이 달려갈 길을 다 갔으니 그 짐을 내려놓은 정 이사장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S)

2009.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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