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몇십년만에 불러보는 아내의 한 맺힌 남·북한 이산의 순애보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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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모습과 함께 합성해 만든 고현봉 목사의 특별한 가족사진 |
“이 세상에서는 당신을 만나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다 틀렸군요. 우린 하늘나라에서나 만나 볼 수 있겠습니다. 한가지 소원은 죽어서 당신과 한 무덤에 묻히는 것입니다”
이북에 두고 온 88세 아내의 애절한 순애보 같은 편지로, 남한에서 홀로 지내고 있는 고현봉 목사(88세)에게 전해진 편지 내용이다. 고 목사는 이 편지를 받아 보고 “정말 당신은 참 열녀입니다. 당신의 편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의 소망도 이제 만날 수 없다면 통일이 되는 날 함께 한 무덤에 묻히는 것입니다”라는 유언같은 내용을 답장에 써서 인편에 보냈다.
이와 같은 사연은 지난 3월 14일(월) 오후 5시 30분 부산 영락교회당에서 열린 고현봉 목사와 이북에 두고 온 유정희(88세) 사모의 미수연 감사예배에서 고 목사가 전한 내용이다. 두 분의 생신이 하루 차이로 고 목사는 3월 13일, 사모는 14일이다. 이를 기념해서 부산영락교회(윤성진 목사)에서는 미수연(米壽宴) 감사예배를 드렸다.
특히 이날은 올해로 100세를 맞이한 구영기 목사(수정교회, 부산노회 공로목사)가 참석해 축도를 하였고, 그 외 같은 장로회신학교 1회 동기동창인 한원도 목사(부산동노회 공로목사)가 만찬기도를, 그리고 같은 동년배 동료 원로목회자들이 미수연을 축하했다.
이날 고 목사는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 말하면서 “더구나 북한의 경제사정이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살아있다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편지에 건강이 악화되어 거동이 불편하다는 내용으로 보아 아마도 중풍인 것으로 예측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3국에서 만날 수가 있는데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은 몸이 불편해 그렇게 전했으리라 봅니다”고 전했다.
축사를 맡은 이종승 목사는 고 목사에게 전해들은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며 고 목사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몇해 전, 중국에서 그렇게도 그리운 큰 딸을 만났습니다. 3녀1남을 두고 33세 때 1.4 후퇴시 남하해 50년 만에 큰 딸을 중국에서 만난 것입니다. 딸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때 거지가 들어오는 줄 알았습니다.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니 큰 딸이 분명했습니다”
50년만에 상봉한 딸의 이런 모습에 고 목사의 맘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첫째 딸에게 전해 들은 가족들의 소식은 둘째 딸은 행방불명되었고, 아들은 결혼해서 손자 3명을 두고 있다고 했다.
“여보 몇십 년 만에 당신을 불러봅니다....”고 시작한 사모가 보낸 편지처럼 50년이 넘도록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보면 한반도가 가진 아픔의 흔적이 아직도 씻어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평안남도의 한 믿음의 집에서 출생
1918년 평안남도 평원군 양화면에서 출생한 고 목사는 일찍이 신앙을 가지고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학교를 다닐 적부터 줄곧 우등생이었던 고 목사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남도 초등학교 교사로 임명되어 근무했으며, 45년에는 양화초등학교 교감으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해방이 되어 일본인 교장이 물러가고 자동적으로 교장직을 승계해 당년 28세 연소(年少) 교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공산 정책에 따라 공산당원 입당을 권유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중고등학교 교사 자격 검정시험에 응시하여 국어과에 합격하여 동평중학교 교감으로 근무했으나 이도 공산당원이 아니라는 뜻에서 더 이상 교사직을 맡을 수 없었다.
그때 나이 31세. 슬하에 4명의 자녀가 있었으나 당장 생활유지도 곤란하게 됐다. 그리고 조만식 장로가 당수로 있는 조선 민주장 평원군 당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하게 되었을 때 연석회의에 민주당 대표로 참석하여 공산당 정책에 배치되는 발언을 했다고 하여 유치장에 구금되었을 당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는 장로의 아들과 목사의 사위가 되어 어떻게 교회의 일은 해 볼 생각도 아니하고 세상 일만을 하고 있느냐?” 이 물음에 고 목사는 “예, 하나님 감사합니다”고 순종했다.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한 고 목사는 49년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안주노회 전도사 고시를 합격하고, 수우리 교회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신학교 별과 및 본과와 대구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신학교를 수료하는등 신학공부와 사역에 매진했다.
이후 제주도와 서울, 미국등지에서 사역을 펼치던 고 목사는 서울 신학교 장로회 신학교 역사신학 교수직을 통해 후진 양성에 힘써왔다.
69년 2월에는 부산영락교회 목사로 부임해 지금의 영락교회가 있기까지 많은 공로를 세웠으며, 81년에는 예장통합 제66회 총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영남신학교 교수, 부산영락고등공민학교 교장, 부산노회장, 부산기독교 교회협의회 회장직을 역임하며 부산 교계에서도 활발한 활동으로 부산 성시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축복으로 미수연 맞아
일제시대와 해방, 6.25등 힘든 시대 상황 속에서 수많은 일들을 겪은 고현봉 목사는 올해로 미수연을 맞았다. 그 험한 생의 가운데 반세기가 넘는 시간은 고 목사가 홀로 남하하여 보낸 시간이다. 북에 아내와 자녀를 두고 온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있는 고 목사와 유정희 사모는 두 분 다 어찌할 수 없는 시대 상황에서 별거를 하였으나 중혼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그 순애보를 이어오고 있어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는 않지만 합동 미수연을 가지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고 목사는 이날 참석한 사람들에게 “짧지않은 생애에 있어서 오늘이야 말로 가장 인간적으로 영광스럽고 가장 복된 시간으로 생각하며 귀한 모임과 귀한 축하와 수고에 보답하기 위해서 앞으로 살 동안도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 살겠다”며, “모든 일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했으며,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는 긍지를 갖고 살 수 있어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고 전했다.
효심깊은 후임목사의 섬김
요즘 원로목사와 후임목사간의 좋지않은 감정대립으로 교회가 분열되는등 뉴스거리들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본다. 그러한 시점에서 이날과 같이 원로목사를 위해 담임목사와 성도들이 원로목사의 미수연을 이렇듯 할 수 있는 것은 자식 못지않은 효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날 참석한 부산영락교회 성도들은 고 목사의 미수연을 축하하는 동시에 담임목사인 윤성진 목사의 효심에 또한 감동했다고 전했다.
참 오랜시간 하나님의 그늘 아래서 살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고 목사가 인사말에서 전한 것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나라에서도 그의 모습이 하나님의 충성된 종의 모습이기를 바래본다.
손진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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