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지일 교수 (부산장신대학교 교회사)
 |
| 탁지일 교수 |
▣문제제기
한국선교 120주년 기념은 알렌선교사의 조선 도착을 그 기원(紀元)으로 하고 있다.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는 1884년 9월 20일에 알렌이 경성에 내주(內住)하여 선교함으로써 한국교회가 “창건(創建)”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알렌의 입국 25년 후인, 1909년에는 ‘미국장로교 한국선교 25주년 기념대회’가 평양에서 개최되었고, 50년 후인, 1934년에는 ‘한국선교 50주년 희년 기념행사’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는데, 양자가 모두 알렌의 조선 입국을 그 기원으로 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도 ‘한국교회 100주년’과 ‘한국선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그 역사적 기원을, 미국북장로교회의 첫 상주 선교사인 알렌의 조선 도착 사건에 두고 있다. 이를 기원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는, 1984년 9월부터 1985년 4월까지, 알렌과 언더우드의 내한을 기원으로 하는 “한국교회 100주년”을 기념하였다.
대부분의 한국교회사 서술들도,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의 역사적인 ‘부산 도착’에 대한 기록은 생략한 채, ‘제물포 혹은 서울 도착’에 대해서만 주로 서술하고 있다. 심지어 영남지역 장로교회의 역사를 각 노회를 중심으로 종합적으로 기술한 ‘韓國嶺南敎會史’에서마저도, 부산에 대한 언급은 없이, 알렌이 9월 20일 한국 땅에 상륙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역사적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알렌의 조선 도착은 ‘1884년 9월 20일 제물포’이 아니라 ‘1884년 9월 14일 부산’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알렌이 처음 도착해서 밟은 조선의 땅은 제물포가 아니라 바로 부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만약 한국교회가, 알렌선교사의 조선 입국을 기원으로 하여 한국선교 120주년을 기념한다면, 그 한국선교 120주년의 이야기는 ‘1884년 9월 20일 제물포’ 혹은 ‘9월 22일 서울’이 아니라 ‘9월 14일 부산’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선의 관문 부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일본을 통해 조선에 왔던 선교사들이 처음 밟은 조선의 땅은 제물포가 아니라 부산이었다. 부산은 선편으로 북미나 일본으로부터 조선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1876년에 개항된 부산은, 원산(1880년 개항)과 제물포(1883년 개항)와 비교해 볼 때, 당시 가장 큰 규모의 개항지였으며, 일본의 나가사키로부터 조선으로 오는 모든 선편은 부산에 가장 먼저 기착하였다.
63세의 나이로 1894년 2월에 한국에 도착하여 1897년까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한국을 여행한 이사벨라 비숍이 1897년에 출간한 조선여행기인 ‘Korea and Her Neighbors’에 보면, 다른 어떤 자료보다도, 일본에서 부산에 이르는 상세한 여정을 관련 지도들과 함께 제공하고 있다. 그 지도에 표시된 그녀의 여정에 따르면, 일본에서 조선에 이르는 선편은, 나가사키에서 출발하여, 부산에 기착한 후, 제물포, 서울, 평양, 원산으로 이어졌던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비숍은 일본 나가사키로부터 조선의 부산과 제물포에 이르는 길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나가사키(長崎)에서 조선의 남단에 위치한 부산(釜山)까지는 기선으로 15시간이 걸린다.... 1885년 초반 일본 우선(郵船)회사는 5주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부산을 왕래하는 기선 1대와 한 달에 한번씩 제물포(濟物浦)와 부산을 왕래하는 작은 배를 운행한다. 지금은 크든 작든 간에 부산에 기선이 기착하지 않는 날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비숍의 책 제1장의 제목은 ‘조선의 첫인상’인데, 여기서 그녀는 ‘부산’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즉, 반세기 동안 세계 각국을 여행한 그녀에게는 적어도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 조선의 첫인상’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제2장의 제목은 “서울의 첫인상”이며, 여기에서는 조선의 왕도 서울에 대해 쓰고 있다.
이처럼, 누구든지 북미에서 일본을 거쳐 조선에 올 경우, 분명히 ‘부산은 가장 처음 접하게 되는 조선의 땅’이었다. 이것은 19세기 말 조선에 온 첫 상주 선교사들인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의 조선 입국경로
알렌의 조선 도착에 관한 대부분의 한국교회사의 서술에는, 부산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 알렌의 제물포 및 서울 도착에 대해서만 주로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알렌의 日記’에 기록된 그의 조선 입국경로를 보면, 알렌은 분명 ‘1884년 9월 20일’이나 ‘9월 22일’이 아니라 ‘9월 14일’에 선교지 조선(부산)에 첫 발을 내딛었다. 뉴욕 공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고, 한미외교사연구의 사료로 활용되는 ‘알렌문서’에 있는 ‘알렌일기’에는, 알렌이 중국 상해를 떠나 난징號 편으로 조선으로 와서, ‘1884년 9월 14일 주일’ 조선 땅 부산항에 첫 발을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알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한국교회사관련 서적이나 논문 등을 보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조선 입국에 대한 서술도 역시, ‘1885년 4월 2일 부산’이 아니라 ‘1885년 4월 5일 제물포’로 대부분 기술되어 있다. 물론, 1885년 4월 5일이 부활주일이라는 교회사적 상징성과 의미가 담겨져 있는 시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조선에 도착한 날과 장소’는 분명히 ‘1885년 4월 2일 부산’인 것 또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언더우드의 자필 편지에 따르면, 그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도착한 뒤, 증기선을 이용하여 나가사키로 가서, 부산으로 오게 된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그의 편지 어디에도 부산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최종 목적지인 제물포와 서울에 대한 관심만이 있을 뿐이다. 왜 언더우드는 그의 첫 편지들에서 그가 처음 밟은 조선 땅인 부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언더우드는 조선이라는 나라보다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오기를 원했던 것일까? 그의 목적지는 ‘조선’이아니라 ‘서울’이었을까? 아니면, 그에게는 ‘서울’이 곧 ‘조선’이었을까?
그렇다면, 과연 조선에 온 미국북장로교회의 첫 상주 선교사들에게 부산은 그저 지나쳐가는 경유지에 불과한 곳이었을까? 하지만, 다행히도, 이후 그들의 조선에서의 선교사역을 보면, 부산은 그들의 단순한 경유지가 아니라, 조선선교를 위한 중요한 선교거점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미국북장로교회는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과 평양에도 선교적 관심이 많았다. 1891년 부산과 평양에 선교본부를 설치하고, 부산에는 윌리암 베어드를 그리고 평양에는 사무엘 모펫을 파송하였다. 언더우드의 기록에 따르면, 미국북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에 의한 의료, 여성, 교육 분야 등에서 다양한 선교가 이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언더우드 자신도, 복음화해야 할 750,000명의 생명이 경상남도에 있다고 보고하고 있고, 게다가, 부산에 대한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언더우드였다.
조선에 처음 올 때에는 별다른 관심조차 끌지 못했던 부산은, 훗날 언더우드에게는 중요한 선교 거점이 되었다. 그리고 언더우드에게 그의 아픈 몸을 회복할 수 있는 쉼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언더우드는 후두염으로 인해 고생할 때, 그는 남쪽 항구의 온화한 기후가 병세의 호전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몇 주간 부산을 방문하였다.
▣부산에서 시작하는 한국선교의 역사
한국교회사의 서술에서 ‘부산’ 이야기의 ‘실종’ 혹은 ‘약화된 의미부여’의 원인은 무엇일까? 혹시 개항을 통해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되어버린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부산이라는 주변’보다는, 그래도 조선의 정치외교의 ‘중심인 서울’이 한국교회사의 시작이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제가 침략했던 36년 동안의 삼천리반도는 ‘일본천황의 땅’이 아니라, 일제에 강제로 빼앗겨 능욕당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되찾을 ‘금수강산’이었던 것처럼, 당시 개항지 부산은 일본인들의 절대적인 영향력 하에 있었지만, 분명히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알렌과 언더우드의 서울에 초점을 맞춘 선교적 관심은 그들의 기록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1883년 8월 20일부터 1886년 10월 25일까지 기록된 그의 일기 서문을 보면, 알렌이 조선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장소는 분명 부산이 아니라 서울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조선 왕실의 “시의”였고, 서울주재 각국 공사관부의 “의사”였으며, 주미전권공사의 “외교자문”이었다. 그에게 개항 후 일본인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부산에 대한 관심보다는, 서울에 머물며 기울어져가는 조선왕실의 주권회복을 돕는 “主媒介者(chief instrument)”되기를 알렌 자신도 원하고 있었다.
언더우드 역시 초기에는 서울의 정치지도자들을 통한 효과적인 조선선교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885년 2월 16일자 언더우드의 편지에서 언더우드는 상류층 정치지도자들을 통한 조선 선교 계획을 숨기지 않고 있다. 언더우드는 갑신정변의 실패를 보며, “최근, 개화당이 정국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성공을 거두었다면 틀림없이 선교 사역이 크게 활발해져, 증가한 사역 양을 감당할 일손이 부족하였을 것입니다.”라고 아쉬워한다.
반면, 언더우드와 같은 배를 타고 한 날 한 시에 조선에 온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에게서는, 그가 처음 밟은 선교지 조선 부산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조선 도착 후, 처음으로 미국북감리교회 해외선교부에 보낸 1885년 4월 9일자 편지에서, 조선으로의 여정과 그가 ‘1884년 4월 2일’ 첫 발을 내딛은 개항지 부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언더우드와 한 배를 타고 조선에 온, 아펜젤러에게는 부산이 단순히 서울로 가기위한 ‘경유지’가 아니라 ‘선교지’이었던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부산을 돌아보면서, 선교 현지에 대한 직접적인 배움의 시간을 갖는다. 그는 얼굴을 돌리는 여인네들을 보면서 조선인의 “은거정신”을, 그리고 경작되는 땅을 바라보며 조선 사람들의 “무관심과 절대 나태가 이 나라의 빈곤과 불행의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고 나름대로 진단하며, 그의 조선선교를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알렌과 언더우드처럼, 아펜젤러도 역시 이러한 조선의 문제가 정치적 중심인 서울의 사회질서 회복과 강력한 정부의 등장으로 인해서만 해결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주목할만한 것은, 캐나다에서 온 초기의 선교사들과 부산의 만남이다. 1888년과 1893년에 각각 조선에 온 캐나다 선교사들인 제임스 게일과 윌리엄 매켄지의 부산에 대한 언급과 감회가 아주 인상적이다. 그들의 부산도착과 관련한 기록을 보면, 부산도착 후, 게일은 선교지 조선과 그 백성들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고 있고, 매켄지는 조선에서의 선교사역을 위해 “생명을 걸고 헌신”하기로 다짐하고 있다. 적어도 게일과 매켄지에게는 ‘부산’은 ‘조선’의 땅이었다.
특히, 1893년부터 1895년까지 한국교회의 요람지인 솔내에서 짧지만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매켄지는 그의 일기에서 조선의 관문인 부산 도착의 감회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에게는 정치지도자들을 통한 위로부터의 선교가 가장 효과적인 조선 선교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제물포 입항과 서울 입경이 그들에게 중요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캐나다 동부 해안 출신이면서, 캐나다 원주민 선교에 온 힘을 기울였고, 그리고 조선에 온 후, 황해도 솔내에서 조선 사람처럼 입고, 먹고, 살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숨져 조선 사람 곁에 묻히고, 지금은 그 묻힌 자리마저도 잊혀져버린, 매켄지에게는 ‘서울’, ‘제물포’, ‘부산’이라는 구분은 무의미 했다. 매켄지에게는, 각기 다른 그 지역들은 그저 하나님께서 맡기신 선교지인 ‘조선’일 뿐이었다.
매켄지가 부산의 땅을 감격과 설레임 가운데 밟은 후, 그는 조선말을 배우려고 시도를 하였고, 실제로 몇 마디 조선말을 배우며 첫 기쁨을 느낀다. 그는 “부산에서의 첫날은 생명을 걸고 헌신하기로 다짐한 선교현장을 이제 정면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산’은 19세기 말 일본을 통해 선편으로 조선에 들어오는 모든 선교사들이 처음 밟았던 조선의 관문이었다. 첫 상주 선교사들인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조선에 올 때, 그들이 처음 도착하여 밟았던 조선의 땅도 그래서 제물포도 서울도 아닌 ‘부산’이었다. 1876년 개항이래로 ‘부산’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 능욕당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산’은 “일본천황의 땅”이 아니라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의 일부였다. 나아가 ‘부산’은 서울, 평양과 함께 북미교회에 의한 초기 선교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던 부산경남지역 선교의 중심이었다.
한국교회가, 만약 “한국선교 120주년”을 첫 상주 선교사 알렌의 조선 도착을 기원으로 하여 기념한다면, 그 정확한 기원은 1884년 9월 20일 제물포 도착이나 1884년 9월 22일 서울 도착이 아니라, ‘1884년 9월 14일 부산 도착’이다. 그렇기에, 한국선교 120주년의 감격스러운 이야기는, 제물포나 서울이 아니라 ‘부산’으로부터 시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