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서울YMCA에서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회와 함께 일제시 YMCA를 이끈 지도자 10인을 선정 ‘YMCA인물콘서트’출판기념식을 가졌다. YMCA연맹결성100주년을 맞는 올해 이를 기념하여 Y와 사회를 이끈 믿음의 지도자들을 2회에 걸쳐 요약 발췌하여 소개한다.
●영원한 청년 월남 이상재(1850~1927)
정치가로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운동을 통해 민족운동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고종 18년(1881)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고종 25년(1888) 전권대신 박정양을 수행하여 주미공사 서기로 부임했다. 미국에 다녀온 후 신문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광무 2년(1898)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단일전선을 결성하여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된 ‘큰 어른’이자 ‘진정한 원로’였다. 1927년 한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된 장례식에 40여만의 인파가 운집한 것은 이 시대 존경받는 이들이 없는 교계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춘원 이광수는 “신념이 없고, 용기가 없고, 희망이 없는 세대에 신념과 용기와 희망의 순결한 사람의 전형으로 살 모범을 우리에게 주는 것만으로 옹은 국보요 우리 청년의 선생이시다.”고 하였다.
●경무관 출신 평신도 전도자 김정식(1862~1937)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경찰의 고위직 경무관으로 있으면서 독립협회지도자들과 친했다. 시위를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았다고 견책당한 뒤 파면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전복을 꾀했다는 수구세력의 음모로 이승만, 신흥우, 이준 등이 1900년 말 체포된데 이어 1902년 이원긍, 이상재 등과 함께 체포 되었다. 자신의 직장동료로부터 무고한 죄인취급을 받곤 낙담했으나 성경과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고 회심하였다. 자식 열 명을 모두 잃는 고통 속에서도 부인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며 청빈의 삶으로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 2.8독립선언의 산실 동경Y를 창설하고 평생 Y운동에 매진했다. 일본의 우치무라와 깊은 교분을 맺었다. 우치무라는 그를 높이 평가하여 반전론을 펴다가 불경죄로 몰려 일본사회 교계에서 소외당하고 있을 때 그를 찾아가 위로하였고, 우치무라는 105인 사건으로 조선 기독교인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일본의 잘못을 질책하며 김정식을 찾아가 위로해 줄 정도였다.
●교회와 사회와 민족을 섬긴 대구·경북의 거인 이만집 목사(1876~1944)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받곤 ‘예수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에 호흡을 멈출’ 정도의 도전을 받고 회심했다. 34살에 장로가 된 뒤 42살에 목사가 되어 토착교회의 존경받는 목회자이자 YMCA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당시 그는 교회뿐 아니라 대구경북 사회를 이끌어 간 제1의 지도자였는데 1915년 ‘교남기독청년회(현 대구YMCA)’를 조직하여 사무실을 남성정(현 대구제일)교회 내에 두어 대구경북지역의 청년들을 결집하여 선교활동과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청년운동의 요람이 되게 하였다.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을 통하여 전국 어느 도시보다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던 도시다. 그러나 3.1운동은 조금 늦은 1919년 3월 8일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3년형을 복역 중 석방되었다. 선교사들의 정신적 지배로부터 독립하자는 자치교회를 주창하여 자주적이며 자치적인 교회를 역설하다 제명되는 수모를 당했으나, 지난 2005년 82년 만에 복권되었다.
●기독교 사회주의자 이대위 선생(1896~1982)
일제강점기시 이대위는 두 분이 있다. 한분은 샌프란시스코 초기 이민사회에서 신앙과 만족지도자였던 이대위(1878-1928)목사와 1920년대 YMCA를 중심으로 일종의 기독교사회주의 입장에서 민족운동과 사회개혁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던 분이다. 그는 YMCA연합회 학생부 간사로 있으면서 전국의 각 학교에 구성되어 활동 중인 학생Y를 지도, 지원했으며 YMCA기관지인 <청년>지를 비롯하여 기독교계 신문잡지는 물론 일반잡지에도 활발하게 논설을 발표하여 당시 한국사회에 풍비하던 사회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이해, 수용, 활용한 분으로 일종의 기독교사회주의 사상까지 나아가 주목받은 인물이다. 1930년대 이르러 자신의 한계, 시대의 상황변화와 제약 등으로 우파적 기독교 진영의 민족운동에 만족하고, 자신의 신념 속에서 민족운동, 사회개혁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한 그의 행보는 한국사나 한국기독교사에서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는 평가다.
●광주·전남 근현대사의 거목 오방 최흥종 목사(1879~1966)
1930년 광주 그는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광주 첫 번째 신자이자 식민지 민초들의 아버지요 광주 YMCA의 창립자인 오방 최흥준 선생은 광주 전남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조국과 민족, 교회와 사회 그리고 소외계층을 위한 헌신했다. 대한제국기에 순검으로 있으면서도 의병을 후원했으며,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노동, 농민, 청년, 교육 등의 사회운동과 신간회운동 등 민족운동에 참여했으며, 1911년 한국 최초의 한센인 치료시설인 나병원을 설립하고 병자 구호활동에도 큰 관심을 쏟았다. 기독교인으로 신사참배에 순응하지도 않았으며, 좌우 양측을 아우르며 신망이 깊어 광주 전남과 Y를 뛰어넘는 큰 인물로 생의 마지막 100일을 성경을 읽으며 단식으로 마무리하여 감동을 더했다. 작가 문순태가 우리시대 마지막 성자라고 격찬하고 그의 생애를 다룬 소설 ‘성자의 지팡이’를 각색한 ‘오방선생’은 광주1백년사 연극시리즈에 첫 번째로 공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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