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과 6·25전쟁을 기념하며 감사하는 마음 키워야
전쟁 속 우뚝 선 십자가
6·25때 세워진 교회, 부산·경남 20여곳
6월은 나라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는 달이다. 6일은 현충일, 25일은 6·25가 일어났던 날이며, 26일은 북한선교주일로 지키게 된다. 5월 동안 가정에 대해 생각을 했다면, 6월에는 거국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이다.
현충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는 오후 1시부터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기 위한 국민대회가 열렸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 이날 대회는 1부 기도회와 2부 국민대회로 나뉘어 진행됐다.
이 행사를 통해 전광훈 목사(청교도영성훈련원장)는 “요즘 학생들은 주한미군을 침략군으로, 한국 분단의 책임은 미국에게, 6·25 전쟁은 북침으로 각각 알고 있다”며 “이는 전교조 교사들의 영향으로, 1천만 국민들이 이러한 세력에 맞서 올바른 대한민국을 위해 일어나야 한다”고 대회의 취지를 전했다.
이날 행사를 통해 ‘국가 정체성 회복을 위하여’, ‘자유 통일을 위하여’, ‘북한동포 인권을 위하여’를 놓고 합심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부산 소망성결교회(원승재 목사)는 6월 1일 옥천초등학교에서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을 초청해 체험행사를 열었다. 이날 행사를 통해 참전용사들은 학생들과 주먹밥을 먹고, ‘전쟁과 평화 사진전’ 감상을 하며, 호국보훈의 의미를 되새겼다. 용사들은 당시의 체험담을 학생들에게 전하고, 학생들은 감사편지를 써서 전달하는 뜻 깊은 자리였다.
전쟁 속에도 우뚝 선 십자가
6·25전쟁 중 부산지역에 세워진 교회는 상당하다.
먼저 부산 영락교회(담임 윤성진 목사)를 들 수 있다. 부산영락교회는 6·25전쟁으로 설립된 교회로, 서울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와 교인들이 부산으로 피난 와서 1951년 1월 7일 첫 예배를 드림으로 세워졌다.
산정현교회는 6·25전쟁으로 분산돼 각처에서 설립됐는데, 부산 산정현교회(담임 문영도 목사)는 1951년 10월 부산시 중구 동광동에서 천막으로 산정현교회를 재건했다.
부산서교회는 6·25로 부산에 피난 온 평양 서문밖교회 장로 4명을 비롯한 피난 성도들이 교회를 창립해 세워졌다.
6·25전쟁 당시 북진했던 UN군이 1951년 1월 4일 평양을 철수하게 될 때 많은 이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월남을 했다. 그들 중 한양공대의 교수들이 중심이 돼 부산 서구 남부민동 피난민촌 주변에 한양공대 가교사를 짓고, 1952년 3월 2일 초대 목사로 염명수 목사와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한양교회와 남부민교회로 분리 발전하게 됐는데 은성교회의 전신인 한양교회와 남부민교회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전쟁 중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고, 예배를 드렸다. 손양원 목사는 6·25가 일어나고 공산군이 내려왔을 때에도, 하루에 세 번씩 종을 치고 예배를 드렸다. 그때 설교는 주로 “잘 죽자”는 메시지였다고 한다. 피난을 권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것을 거절하며 “세상에 피난처가 어디 있는가! 피난처는 오직 주님 품 뿐이다”라고 피난을 거절하며 나환자들의 곁을 지켰다.
6·25전쟁 후 교회에 미친 영향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출간한 ‘한국 기독교의 역사Ⅲ’에서 한국교회의 문제가 6·25전쟁을 겪으면서 발생하고 강화되었다고 진단한다. ‘6·25전쟁과 교회’를 통해 이 글은 1950년대에는 교회가 교인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구제기관으로 알려질 정도로 사회구호 단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점차 봉사의 폭을 넓히면서 ‘사회보호 기능’을 담당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때의 경험은 이후 한국교회와 기독교 시민단체들이 북한지역을 포함한 세계 전역에서 구호 및 봉사활동을 하는 데 큰 자원이 됐다고 보는 것이다.
긍정적인 영향 뿐 아니라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는데, 구호품 분배과정에서 교회가 다툼의 장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구호품과 원조의 가장 큰 수혜자였던 교회에 영향을 미쳐, 이후 한국교회가 친미적인 태도를 갖는데 기여했음을 드는 것이다.
또한 이 글은 6·25전쟁 이후 이단적 단체가 출몰했음을 들고 있다. 교회의 다른 쪽에서는 기도원을 중심으로 은사집회가 확산됐고, 영향력을 가진 이단적 단체가 발생해 기독교 신앙공동체를 큰 혼란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기도원이 많이 생겼고, 성령체험의 표시로 방언, 예언, 입신, 신유 등의 신비스런 종교현상이 중시됐으며, 참석한 이들은 이러한 것들을 체험하고자 했다. 기도원 이외에 사설 예배소와 안수 기도소들이 새로 생겨, 이른바 ‘은혜자’를 중심으로 가정집에 모여 안수기도로 병을 고치는 현상도 생겼고, 나운동 용문산기도원에서 방언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전쟁 직후 기도원과 사설 예배소, 오순절파 교회를 중심으로 신비체험이 신도들의 관심을 끌고 있을 때, 몇몇 새로운 신앙 집단들이 새로운 형태의 교리와 제의를 내세우며 등장을 했는데, 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와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전도관)가 대표적인 집단이라고 들고 있다.
6·25전쟁과 부산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 이상규 교수(고신대)는 ‘부산지방에서의 기독교의 전래와 발전’이라는 글에서 “부산은 한국전쟁 중의 최후의 거점으로서 교회는 고난 중에 있는 한국인들의 ‘의의 피난처’ 역할을 감당했다. 부산에 피난민들이 집중하게 되고, 월남인구가 증가하게 되자 새로운 교회의 설립은 당연한 요구였다. 특히 타지방에서 장로교 아닌 다른 교파의 신자의 유입은 성결교, 침례교, 감리교 순복음 등 다른 교파 교회의 설립을 가져왔다”고 전했다.
또한 “1940년 당시 부산시내의 (장로)교회는 23개 처였고, 다른 교파의 교회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말 부산의 장로교회는 49개 처에 지나지 않았고, 교역자는 목사가 10명, 전도사가 23명, 합 33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다른 교파의 교회는 불과 손꼽을 정도였으므로 부산지방의 교회는 60개 미만의 교회가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6·25동란과 부산에로의 피난인구의 집중은 급격한 인구 증가를 가져왔고, 이 지방교회 또한 급속도로 증가되었다. 그 결과 다수의 교회가 1950년대 초에 설립되었다.”고 했다.
이상규 교수는 이 때 다수의 교회가 설립된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1950년대 초에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의 분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대립과 혼란가운데 있던 교회는 1952년 고신교회가, 1953년에는 기장교회가 분립되었는데, 이 분열의 여파로, 교회가 분립하거나, 새로 설립된 교회들이 많게 되었다. 이것은 비단 부산의 경우만은 아니다. 가까운 대구 지방의 경우도 동일했다. 이런 경우의 대표적인 교회가 부산 삼일교회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한국전쟁의 결과로 다수의 외지인들이 부산으로 유입되어 옴으로서 기독교인구의 증가는 새로운 교회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부산은 최후의 거점이었고, 피난민들은 현세에서의 고난을 신앙 안에서 극복하고자 했던 종교적 각성이 교회 설립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셋째는 월남인구의 증가로 볼 수 있다. 피난민과 함께 다수의 월남인들이 부산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은 새로운 정착지에서 교회를 설립하거나, 북한에 두고 온 교회를 재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산정현교회, 대청교회, 대성교회, 부산서교회 등이다. 월남한 기독교인들이 실향의 아픔을 신앙 안에 수용하고자 했으므로 정서적으로 별도의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던 점도 이해할 수 있다.
전쟁을 통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외국인 참전용사들까지,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나라를 위해, 특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억하는 6월을 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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