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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하하는 피난민(사진제공 6.25전쟁60주년기념사업회) |
- 피난민과 월남인들로 부산 인구 급증 … 교회 개척 및 재건으로 이어져
- 부산지역 130개 교회가 1950년대 초에 설립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으로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인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아직도 38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이 나뉜 채 오는 6월 25일(금), 6.25전쟁 60주년을 맞이한다.
올해 60주년을 맞아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발족했다. ‘전쟁 회고보다 참전용사에게 감사하고 세계 평화에 기여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사업회는 올해가 참전용사들이 참가할 수 있는 10주년 단위 마지막 행사라고 설명했다. 생존참전용사는 국내에 25만명, 해외에 53만명이 살고 있으며 이들 평균 연령은 79.4세이다. 이로서 생존 참전용사들이 참가할 수 있는 6.25전쟁 10주년 단위의 기념행사는 올해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올해 6.25전쟁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군의 조직적인 공격력에 남한 대부분이 점령당했다. 부산이 임시수도로 지정되면서 전쟁으로 인한 피난민들이 부산에 집중됐다. 1949년 부산의 인구는 47만명이었으나 6.25전쟁 이후 1951년 84만명, 1955년 104만명으로 증가했다.
인구의 이동은 교회 설립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전쟁으로 부산에 피난민이 몰려오자 교회도 급격히 증가했다.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 이상규 교수(고신대)는 ‘부산지방에서의 기독교의 전래와 발전’이라는 글에서 “부산은 한국전쟁 중의 최후의 거점으로서 교회는 고난 중에 있는 한국인들의 ‘의의 피난처’ 역할을 감당했다. 부산에 피난민들이 집중하게 되고, 월남인구가 증가하게 되자 새로운 교회의 설립은 당연한 요구였다. 특히 타지방에서 장로교 아닌 다른 교파의 신자의 유입은 성결교, 침례교, 감리교 순복음 등 다른 교파 교회의 설립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또한 “1940년 당시 부산시내의 (장로)교회는 23개 처였고, 다른 교파의 교회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말 부산의 장로교회는 49개 처에 지나지 않았고, 교역자는 목사가 10명, 전도사가 23명, 합 33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다른 교파의 교회는 불과 손꼽을 정도였으므로 부산지방의 교회는 60개 미만의 교회가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6.25동란과 부산에로의 피난인구의 집중은 급격한 인구 증가를 가져왔고, 이 지방교회 또한 급속도로 증가되었다. 그 결과 다수의 교회가 1950년대 초에 설립되었다.”고 말했다.
이상규 교수는 이 때 다수의 교회가 설립된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1950년대 초에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의 분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대립과 혼란가운데 있던 교회는 1952년 고신교회가, 1953년에는 기장교회가 분립되었는데, 이 분열의 여파로, 교회가 분립하거나, 새로 설립된 교회들이 많게 되었다. 이것은 비단 부산의 경우만은 아니다. 가까운 대구 지방의 경우도 동일했다. 이런 경우의 대표적인 교회가 부산 삼일교회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한국전쟁의 결과로 다수의 외지인들이 부산으로 유입되어 옴으로서 기독교인구의 증가는 새로운 교회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부산은 최후의 거점이었고, 피난민들은 현세에서의 고난을 신앙 안에서 극복하고자 했던 종교적 각성이 교회 설립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셋째는 월남인구의 증가로 볼 수 있다. 피난민과 함께 다수의 월남인들이 부산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은 새로운 정착지에서 교회를 설립하거나, 북한에 두고 온 교회를 재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산정현교회, 대청교회, 대성교회, 부산서교회 등이다. 월남한 기독교인들이 실향의 아픔을 신앙 안에 수용하고자 했으므로 정서적으로 별도의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던 점도 이해할 수 있다.
6.25전쟁으로 인한 부산지역 교회 설립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25전쟁으로 인해 부산지역 각처에 교회가 세워진다. 그래서 지난 200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50주년이 되는 교회가 130여 처에 이른다.
부산영락교회(담임 윤성진 목사)는 6.25 전쟁으로 설립된 교회다. 서울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와 교인들이 부산으로 피난 와서 1951년 1월 7일 첫 예배를 드림으로 세워진 교회이다.
월남인들이 북한에 두고 온 교회를 부산에 재건하기도 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낳은 산정현교회는 6.25전쟁으로 분산돼 각처에서 설립됐다. 부산 산정현교회(담임 문영도 목사)는 1951년 10월 부산시 중구 동광동에서 천막으로 산정현교회를 재건했다.
또한 6.25로 부산에 피난 온 평양 서문밖교회 장로 4명을 비롯한 피난 성도들이 교회 창립을 결의해 오늘의 부산서교회(담임 최삼순 목사)가 있게 됐다. 대청교회(담임 박성기 목사) 역시 1951년 부산 중구 보수동에서 평양교회로 시작됐다.
당시 부산 아미동 언덕에 난민촌이 마련돼 이곳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 많았다. 은성교회(담임 여충호 목사)는 6.25전쟁 당시 북진했던 UN군이 1951년 1월 4일 평양을 철수하게 될 때 많은 이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월남했으며 그들 중 한양공대의 교수들이 중심이 돼 부산 서구 남부민동 피난민촌 주변에 한양공대 가교사를 짓고 1952년 3월 2일 초대 목사로 염명수 목사와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한양교회와 남부민교회로 분리 발전하게 됐는데 은성교회의 전신인 한양교회와 남부민교회의 효시이다.
‘1907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2007년, 부산이 가진 영적의미를 되새겨보는 기회가 많았다. 부산은 ‘피난처’ 뿐만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발판과도 같았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6.25 직후 부산 초량교회에서 가진 기도회를 잊지 못하고 있다. 당시 초량교회에서 가진 기도회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회개였다. 또한 민족을 구원해달라는 애통의 기도였다. 이로 인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서울수복이라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올해 6.25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부산지역 교회의 영적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오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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