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 데이비스의 삶과 호주교회의 한국선교를 이끌어 간 한통의 편지

호주 선교 120주년 기념 기획
한국 내한 당시의 데이비스 목사 남매


■이상규 교수, 올해 호주 멜버른에서 ‘역사적 편지’ 발굴
■한통의 편지로 데이비스는 한국, 부산으로 향한 계기

금년 2009년은 호주의 첫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1856-1890)가 내한한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1880년대 한국에서는 4개 장로교 선교부가 선교사역을 시작했는데, 미국북장로교, 미국 남장로교, 캐나다장로교, 그리고 호주 장로교가 그것이다. 특히 부산지방과 경남지방에서 일한 선교부가 ‘호주장로교 선교부’인데, 호주 장로교회(정확하게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는 데이비스가 내한한 이후 한국에서 선교사역이 시작되었고 선교 사역은 부산과 경남지방에 집중되었다.
데이비스는 120년 전인 1889년 10월 2일 부산 땅을 밟았고 이틀 후인 10월 4일에는 인천항을 거쳐 서울로 갔는데, 거기서 한글을 공부하는 일로 약 5개월 체류하게 된다. 서울서 한글을 공부하며 조선 적응 훈련을 마친 그는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서 일하겠다는 각오로 1890년 3월 14일 서울을 떠나 인천, 수원, 공주, 경상남도 하동을 거쳐 칠원, 함안을 지나 그해 4월 4일 부산에 도착한다. 그러나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먼 보도 여행과 불편한 잠자리와 음식 탓으로 건강을 잃었고, 폐렴과 천연두에 감염된 그는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인 1890년 4월 5일 토요일 부산에서 사망했다. 한국에 온지 6개월 정확하게 한국 땅을 밟은지 183일 만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부산서 사망한 첫 서양인인 그는 복병산(지금의 남성여자중고교 운동장 자리)에 묻혔다.
그러나 그의 죽음 때문에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회는 큰 충격을 받고 한 젊은이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 없다하여 선교단체가 조직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후속 선교사들이 부산지방으로 파송되었는데 해방 전까지 78명의 선교사(해방 이후까지 120명)가 내한하여 부산, 진주, 마산, 거창, 그리고 통영 지방에 거주하면 선교사역에 매진하게 된다. 말하자면 한 젊은이의 죽음이 큰 결실을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원래 데이비스는 호주의 CMS (영국교회 선교회) 파송으로 인도에 파견되어 약 2년간 일한 바 있고, 건강이 좋지 못해 호주 멜보른으로 돌아온 그는 멜보른 대학을 졸업하고 멜보른 교외인 카오필드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다시 인도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보양해야하는 의무감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1886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다시 인도 선교사로 가고자 했다. 그런데 이 때 데이비스는 한통의 소중한 편지를 접하게 된다.
이 편지는 중국에서 일하고 있던 영국성공회 소속 월푸(John Wolfe)의 편지였다. 월푸는 1887년 힘들게 부산을 방문하고 선교지인 중국으로 돌아갔고, 선교사 없는 부산에 선교사를 보내주도록 여러 곳에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이렇게 되자 월푸목사는 부산 방문기와 한국선교사가 필요하다는 편지를 호주 멜보른의 매캐트니목사(H. B. Macartney)에게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메카트니는 이 글을 자신이 발간하는 선교잡지 《국내국외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에 게재했다. 그런데 인도로 돌아가고자 했던 데이비스는 바로 이 편지를 읽고 한국이 인도보다 더 시급한 복음전도지라는 점을 인식하고 인도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가기로 결단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이 한통의 편지가 호주의 젊은 청년 데이비스로 하여금 한국으로 그리고 부산으로 오게 했던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한통의 편지가 후일 호주의 126명(해방전 78명, 해방 후 48명)의 선교사들이 한국과 부산, 경남지방으로 향하게 만든 동기가 된 것이다.
데이비스가 중국 선교사 울프가 쓴 한통의 편지를 읽고 한국으로 왔다는 점은 백낙준 박사(《한국개신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4, p. 197)이래로 회자되어 왔다. 그 이후의 학자들도 이 한통의 편지에 관심을 가져왔으나 이 편지가 실린 《국내국외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를 찾지 못했다. 나도 23년 전인 1987년 호주 멜보른을 처음 방문한 이래 ‘이 역사적 문서’를 추적했고, 1886-88년 어간에 발간된 이 잡지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120주년을 맞는 금년에 다시 호주 멜버른을 방문하여 이 ‘역사적’인 편지 한통을 찾기 위해 도서관을 뒤지던 중 호주의 영국교회 선교회(CMS: Church Missionary Society)와 빅토리아주 시립 도서관 내의 고문서관에서 이 편지가 게재된 《국내국외선교》를 입수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이 ‘역사적 편지’를 발굴하게 된 것이다.
부산을 방문하고 다시 중국 복주(福州, Foo Chow)로 돌아가 1887년 10월에 쓴 이 편지는 《국내국외선교》1888년 5월호에 게재되었는데, 이 편지에서는 부산을 두 번째 방문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비록 전도의 결실은 없었으나 문자를 아는 현지인들과 교제하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고 썼다. 또 이런 접촉이 시작에 불과하지만 후일 큰 기대를 갖고 있다고 했다. 동행했던 중국인도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조선말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고 했다. 단지 중국인 동료는 조선인들과 말은 할 수 없었으나 한문을 아는 한국인과 필서를 나누며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어 구어체는 매우 어렵고 중국인들도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울프가 10일간 체류하면서 부산과 그 주변 지역을 돌아보았고, 한국인들이 정중하게 받아주었다고 썼다. 이곳 복주(福州)에서 한 사람의 신자를 얻기 위해 10년이라는 지리한 기간을 참고 인내했듯이, 조선의 부산에서도 조급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주님께서 일하실 것을 기대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지역 선교사역을 위해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 이런 말과 함께 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부산인근 지역은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며 선교 사역의 중심지입니다. 내년에는 좀 더 힘차게 일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저는 이곳이 호주교회가 이 이방인들에게 독자적인 선교사를 보내 선교사역을 시작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라고 봅니다. 이 점은 숙고해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 한통의 편지는 인도로 돌아가기를 기대했던 데이비스의 마음을 움직였고, 한국은 인도보다 더 시급한 곳이라는 확신에서 데이비스는 한국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회에 선교사로 자원하였고 1889년 8월 21일 멜보른을 떠나 한국으로 향하는 긴 장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가 조선 땅 부산에 도착한 날이 꼭 120년 전인 10월 2일이었고, 제물포에 내렸을 때는 10월 4일이었다. 서울에서 언더우드와 함께 유하면서 5개월을 체류하며 한글을 공부하고 언더우드와 함께 지역을 순례하며 조선의 사정일 익힌 그가 바울의 원리를 따라 부산으로 오게 되지만(1890년 4월 4일), 부산 도착 이튼날 사망하게 된다. 그의 죽음이 호주(빅토리아)장로교회 선교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죽음으로 빅토리아 주 여전도회연합회가 창립되었고, 또 그를 파송했던 청년연합회는 선교사 파송기관으로 새롭게 출발하여, 이 두 기관이 빅토리아장로교 선교운동을 이끌어 갔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1891년 9월에 호주 선교사 제2진 5명이 내한한 이래 126명이 부산과 경남지방에서 활동했다. 이 한통의 편지가 한사람의 생애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호주 빅토리아 교회의 한국선교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글쓴이-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역사신학)

200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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