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남지역 3.1 만세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이끌었다.


■ 부산진일신여학교를 시작으로 부산지역 3쪾1 만세운동이 시작돼
■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교인들과 교사가 추축, 일반시민합세
■ 초량교회, 김해교회, 마산교회가 주도적 역할

1919년 3월1일 거족식 항일 민족 해방투쟁이 서울에서 시작해 각 지방으로 번졌다. 이에 앞에서 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각 지에 배부되고 또 고종의 장례에 참가했던 많은 인사들이 독립선언서를 몸에 품고 속속 귀향해 서울의 항쟁상황을 지방에 알리게 됐다.
3월 2,3일 경에는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을 통해 독립선언서가 부산, 마산에 비밀리에 배부되기 시작했다. 이때 서울에서 학생대표가 내려와 경성학생단의 이름으로 부산상업학교, 동래고보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독립운동으로서의 궐기를 종용했다.

부산진일신여학교

부산진일신여학교에서는 3학년 이명시(10회 졸업)가 연락병 역할을 했다. 3월 11일 새벽 일신여학교 기숙사 주변에 격문이 뿌려졌다. 학교로 청소하러가던 고등과 4년생 김응수는 격문을 주워 주경애 선생에게로 달려갔다. 주 교사는 “중앙에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이니 비밀을 지키고 있어라”고 귀뜸을 해주면서 “오늘 저녁 부산상업학생들과 만세를 부르기로 했다”고 알려 줬다. 이 때 일신학교 여학생들은 주경애, 박신연 교사들로부터 민족적인 정신 감화를 많이 받고 있었다.
이에 앞서 주경애 교사는 학생들을 시켜 비밀리에 부산상업학교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고 한편으로는 일신여학교의 동료교사들을 규합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개시됐으므로 일신여학교에서도 결행할 것으로 종용해 이들과 협의 약속한 후 이 사실을 극비리에 고등과 학생들에게 알렸다.
3월 10일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기숙사 고등과 학생 11명은 독립운동으로서의 벅찬 감격을 가슴에 안고 밤이 깊어가는 것을 기다려 풀을 쑤고 이불로 창문을 가린 후 벽장 속에 숨어서 밤을 새워 태극기 50여 매를 만들었다.
3월 11일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친 고등과 학생 11명(김응수, 송명진, 김수어, 김란출, 박정수, 김반수, 심순의, 김봉애, 김복선, 김신복, 이명시)은 교사 주경애, 박시연과 더불어 오후 9시에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숙사 문을 뛰쳐나와 좌천동 거리를 누비며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이 때 거리의 대중들이 여기에 호응했다.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이들에게 나눠줬다. 학생들과 시위 군중 수 백명은 감격에 넘쳐 힘껏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때 일본 군경들이 대거 출동해 저지함으로 시위는 더 계속 할 수 없었다. 출동한 군경은 11명의 여학생 전원과 두 교사를 채포해 부산진 주재소로 안치했다.
일경은 이들을 격리 수용한 후 개별 문호를 시작했다. 그들의 나이는 16세에서 17세의 여학생이었지만 뺨을 때리고 구두 발로 차는 등 그 만행과 횡포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일경들의 한결같은 문초는 주모자를 데라는 것이었다. 이에 학생들을 한결같이 주모자는 우리 모두 다라고 우겼으니 일경의 문초는 더욱 심해졌다. 이를 참다못한 김응수는 ‘세살 먹는 아이도 제 밥을 빼앗기는 달라고 운다. 우리들이 우리나라를 달라고 운동하는 것이 왜 나쁘냐?’라고 항의하자 일경은 분을 참지 못하고 뺨을 때리며 ‘이런 년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위협했다.
이같이 문초가 끝난 다음 날 학생 11명과 교사 2명은 부산형무소에 수감돼 학생들은 모두 징역 6개월을 인도 받고 교사 주경애, 박시연은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인도 받았다. 이때 의거에 같이 참가했던 교사 임말이와 동생 임망이 학생은 그들의 형부였던 형사에게 사건 전모를 이야기해 무사히 석방됐지만 이 사실을 들은 11명의 학생은 극도로 흥분하며 출옥한 후에 전교생의 힘을 모아 10일간의 동맹휴학을 하면서 그들의 출교를 주장했고 임말이와 임망이는 학교에서 추방됐다.
또한 졸업자 중 민주당 총재였던 박순천 여사는 마산 의신여학교 교사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서서 일했으며, 양한나 여사(부산 YWCA회장역임)는 상해 임시정부에 크게 활약했고 박차정은 만주 벌판에서 여자 의용군을 모집하고 대장이 돼 곤륜산 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 끝에 최후를 맞았다.
부산진일신학교 삼일독립만세운동으로 일제에 의해 1년6개월의 징역형을 받은 박시연 교사는 부산진교회학교 교사이며, 6개월의 직역형을 받은 11명의 학생 중 송명전, 김순이, 김란출, 강봉애, 김복선, 김신복, 이명시 7명은 부산진교회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은 신앙을 가진 부산진교회학교 학생들이었다.

3ㆍ1 운동에 참가한 부산교계 교인들

영도지역에서는 영선동교회 옥성학교를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영도지역은 3ㆍ1운동은 옥성학교의 교장이었던 정인주의 동생 정인찬이 주도했다. 그는 교직에 있을때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했고, 3ㆍ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남식과 함께 옥성학교 학생인 김소운, 신기홍, 장용술, 허택윤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이려다가 일경에서 체포돼 3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중 이남식이라는 청년은 영선동교회의 장로로 장립됐던 인물이다. 영선동교회에서는 ‘부산절영도소년단’이라는 애국소년단을 조직해 교회에 모여 애국강연을 했고,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 소년단의 설립자인 김수현은 영선동교회 설립자인 김치몽의 4남으로, 만세사건으로 인해 약 1년 정도의 옥고를 치렀다.
같은 시기에 초량교회에서는 백산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와의 관련성속에서 애국운동을 진행했다. 초량교회 집사인 윤현진 집사는 1892년 양산에서 대동청년단에 가입해 안희제와 협력해 소비조합을 만들려고 했으나 일제의 제지로 실패했다. 결국 안희제, 송문주 등과 함께 백산 상회를 설립하고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윤현진 집사는 3ㆍ1운동 직후 백산상회의 명의로 거금 30만원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고, 이후 상해 임시정부의 재무차장이 됐다가 1923년 상해에서 병사했다.
부산지역 외에도 경남의 김해교회에서 3ㆍ1 운동의 여파가 밀려들었다. 김해지역의 3ㆍ1 운동에 김해교회 교인들이 상당히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세브란스 학교 학생이었던 배동석은 서울지역의 대표로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 3ㆍ1 운동 후에는 김해, 마산, 함안 등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는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갑성의 지시로 2월 26일 마산으로 내려가 마산의 독립운동 책임자인 의신여학교 교사 박순천에게 독립 선언서를 전하고, 김해에 와서 임학찬, 배덕수 등과 더불어 비밀리에 거사를 준비했다. 시위가 시작되자 일경은 3월 28일에 파견근무를 시작했고, 3월 30일의 시위 때에는 김해의 기독교인 7인이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게 체포됐다. 이를 기화로 김해지역에는 시위가 더 크게 번져가기 시작했고, 드디어 김해읍 장날이던 4월 2일에 본격적인 시위가 시작됐다. 약 40여 명이 주동이 돼 시위가 시작되자 일경은 무력 진압을 시작해 송세희와 송세탁이 부상을 당했다. 일제는 시위가 퍼져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시장을 폐쇄시켜 버렸다. 그리고 주동자인 배동석, 임학찬, 배덕수, 박덕수, 송세탁, 송세희 등이 검거됐다. 배동석은 경성감옥에서 복역 중 보석으로 풀려나와 치료받던 중 사망했다. 배동석은 김해교회 설립자인 배성두의 아들이었고, 임학찬은 마산 창신학교의 교사로서 김해교회 교인이었다.
마산지역의 3ㆍ1 운동도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당시 마산교회의 담임자인 한석진은 직접 정치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민족의식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고, 그의 영향으로 3ㆍ1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 많았다. 이갑성은 마산 출신의 세브란스 의학생인 이용상에게 대구와 마산 등지에 독립선언서를 전하게 했다. 이용상은 대구를 거쳐 마산에 이르러 임학찬과 이상소 장로에게 선언서를 전했다.
이 선언서의 일부가 김용환에게 전달됐고, 그는 3월 3일 무학산에서 있었던 고종황제 국장 망곡제에 참여해 거기에 운집한 많은 군중들에게 독립 의지가 담긴 연설을 했고, 독립선언서를 살포했다. 이날 거사에 의신학교 교사 박숙천과 창신의신학교 학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김용환, 이형제 등은 재차 궐기할 것을 다짐하고 마산지역의 애국청년인 명도섭, 최용규, 이정찬 등을 만나 3월10일에 재차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선언서 낭독 중 일경에게 검거돼 김용환은 대구로 압송되고 나머지는 석방됐다. 풀려난 최용규는 이정찬, 최동락, 신택식 등과 협의하고 또, 의신여학교 교사인 김필애, 박순천 등과 화합했다. 의신여학교 학생들 가운데 22명의 결사대가 조직됐고, 그 중에 최봉선, 김남준, 이수학, 안음전 등이 선언서 사본과 격문, 태극기 등을 제작했다. 1919 3월 22일 정오를 기해 마산 시내로 만세의 물결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시위대는 거대한 수로 불어났고, 다급하게 출동한 일본 군경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시키는 한편, 시위 주동자 50여명을 긴급 채포해 구속시켰다. 이들 중 최용규는 마산 형무소에서 1년 6개월, 김용환은 대구 형무소에서 1년, 임학찬은 경성 형무소에서 1년, 이상소 장로는 경성 형무소에서 2년 박순천은 마산 형무소에서 1년형을 살았다. 마산교회는 지역의 지도급 인사들과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교사들이 마음을 함께 해 독립운동의 요람이 됐다.

이득근 기자

2009.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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