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인들에게 “2007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다수 크리스천이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이라고 답할 것이다. 교계도 평양대부흥운동을 기념하면서 한국교회 제2부흥을 일으키기 위해 모든 역량을 결집시키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냥 대부흥운동이 일어났고, 한국교회의 교세가 크게 늘어났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본보는 학계의 자료를 모아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자 한다. <편집자주> 원산대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대부흥운동이 시발점이었다. 원산대부흥운동의 출발은 중국에서 온 남감리교 소속 화이트(Mary Culler White)와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맥컬리(Louise Hoard McCully) 두 여선교사가 함께 모여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시발점이 됐다. 훗날 하디가 자주 고백한 것처럼 바로 이것이 1903년 원산부흥운동 불씨가 되었다. 하지만 원산대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은 남감리교 의료 선교사 하디(Robert Alexa Hardie, 河鯉泳)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게일의 동창생이며, 게일처럼 토론토대학 YMCA의 지원을 받아 1890년 9월에 내한했다. 처음에는 게일과 함께 부산에 있다가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겨 1898년부터는 남감리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그곳에서 의료 선교 활동을 펼쳤다. 원산대부흥운동은 하디가 선교사들 앞에서, 그리고 주일 오전예배 때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 한국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교만, 심령의 강퍅함, 그리고 믿음의 부족”등 자신의 죄악을 낱낱이 털어놓으며 눈물로 참회하고 회개한 것이 주 요인이다. 하디의 고백은 모인 이들의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었고, 그가 고백한 죄악들은 모인 선교사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1904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하디의 원산부흥운동의 영향으로 평양과 서울과 다른 도시들에서도 부흥운동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1904년 10월 하디가 안식년을 앞두고 가진 서울, 평양, 제물포 부흥회는 영적 각성이 뚜렷이 감지되는 은혜로운 부흥회였다. 당시 영향력 있는 선교지(宣敎誌) 코리아 메소디스트(The Korea Methodist)가 보고한 대로 1904년 10월 1일부터 9일까지 정동감리교회에서 열린 하디의 집회에 “성령의 능력이 놀랍게”나타나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06년 10월에 들어서면서 부흥운동을 사모하는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실제로 강력한 부흥운동의 역사가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남장로교 프레스톤 선교구 목포에서 남감리교 선교사 저다인(J. L. Gerdine)에 의해 일어난 목포부흥운동이었다. 평양대부흥운동 평양대부흥운동이 발흥하기 전 조국의 정치적 현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참으로 암울하기 그지 없었다. 일부에서는 시대적 상황이 평양대부흥운동을 가능케 했다는 지적을 낳고 있다. 이 시대만큼 우리 민족이 민족적 위기를 만난 적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1904년 러일전쟁과 그 후에 이어진 을사조약으로 인한 국권의 상실, 그리고 이어 점점 더 노골적으로 진행된 일본의 침략 야욕은 한국인들에게 적지 않은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때문에 일련의 정치적 위기로 민족의 소망이 기독교에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한데다 인도와 웨일즈에서 발흥한 부흥운동의 소식은 한국교회에 부흥에 대한 소망을 한층 더해 주었다. 1907년 1월2일부터 15일까지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2주동안의 부흥사경회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장대현교회에서의 집회가 끝이 나고 참석자들은 대단한 기쁨으로 충만했으며, 그 후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다른 지역에서 계속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 사경회에서 놀라운 성령의 권능을 친히 목격한 그레이험 리 선교사와 블레어 선교사가 “그 사경회에서도 정확히 똑같은 현상, 곧 죄로 인한 무시무시한 탄식과 참회 후의 놀라운 기쁨과 평화가 찾아오는 성령의 임재하심이 있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이 중에서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성령의 불씨를 평양에서 전국으로 가지고 간 주역은 바로 길선주 장로였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평양대부흥운동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알렌(Horace N. Allen)이 길선주를 부흥운동의 기폭제로 이해할 만큼 길선주는 1907년 대부흥운동의 저변 확대에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길선주를 논하지 않고는 평양대부흥운동을 논할 수 없고, 또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고 여러 기록이 전해주고 있다. 그가 얼마나 평양대부흥운동의 저변 확대에 영향을 미쳤는지, 또한 그의 설교가 얼마나 힘이 있었는지는 한 선교사의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잘 나타난다. “1907년 한국의 대부흥운동 때에 길 목사는 평양과 다른 선교부 모두에서 놀랍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다. 그의 설교를 들었는데, 아시아인이든 유럽인이든 청중들에게 그와 같은 놀라운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어떤 국적의 사람을 좀체 만나 보지 못했다. 그의 음성은 달콤하고 그의 예절은 사람을 사로잡았으며, 그리고 그는 놀라운 설득력을 가지고 심령에 호소해, 그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막 웃다가 울다가 엄청난 죄의 확신으로 전율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결과 평양대부흥사경회를 통한 한국교회 형성에 끼친 선교적 영향은 그동안 선교사들로부터 행정적으로, 정치적으로 무엇보다도 신앙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가 1907년 대부흥 운동을 거쳐 한국적 신앙을 나름대로 구축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만약 1907년 즈음에 한국기독교가 대부흥 운동을 통해 힘을 육성하지 못했더라면, 일본 제국주의의 치하에서 고사당하였을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평양대부흥사경회를 통하여 한국교회는 성령운동, 부흥회운동, 사경회운동, 새벽기도, 합심기도, 통성기도 및 회개기도 등의 한국적인 신앙을 형성시킴으로서 이후 한국교회의 체질을 만들어 매우 다양한 한국적인 교회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05년 중국 양자강 변에서 전도하던 미북장로교 고포스(J. Goforth)선교사는 그가 한국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그에게 어느 선교사가 말하기를 6주간 전도 여행에서 500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700명을 학습교인으로 세웠으며 시찰 구역 내의 5교회가 일년이 지난 후에는 12교회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1910년 서울에서 결심서를 제출한 사람이 13,000명이었으며 그해 10월 서울시내 감리교회에서는 3,000명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입교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서해안 쪽 제물포(인천)에는 그곳 감리교 선교회에서는 1908년 800명의 신도가 있는 하나의 교회를 갖고 있었다. 인천시 해안에는 인구 17,000명을 헤아리는 하나의 섬에는 세례 교인이 4,247명이 있었는데 1907년에는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으며 그 섬전체가 주님의 소유가 되기를 교우들은 기도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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