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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타기전 용두산신사 |
1945년 11월 17일 토요일 오후 6시 경, 아직 거리의 움직임을 어렴풋이 식별할 수 있는 초저녁 용두산(龍頭山) 신사(神社)가 불길에 휩싸였다. 현재의 부산 용두산 공원에 자리하고 있던 용두산 신사는 우리나라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신사로서 1675년 3월 금도비라신사(金刀比羅神社)로 시작된 한국에서 신사제도의 기원이 되는 신사였다. 해방된 지 꼭 3개월이 지난 이날 신사 배전(拜殿)에서 발화된 불길은 부산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맞으며 순식간에 본전(本殿)으로 진화되면서 신체(神體)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에 휩싸였다. 신사 경내에 있던 소나무 등 수목은 불길을 전파하는데 기여하여 용두산 신사를 거의 불태우고, 신사의 배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곧 새가 머무는 곳을 상징화한 도리이(鳥居, ㅠ 자 모양의 신사입구)도 검게 그슬려 흉칙한 잔해로 남게 있었다.
이날의 화제에 대해 11월 19일(월)자 민주중보(民主衆報)는 “용두산 신사 소멸”, “방화혐의 농후... 일인의 모략”이라는 제하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우리나라는 신국(神國)이요, 신(神)이 보호하는 우리 국체(國體)는 영원히 불멸할 것이며 우리는 동아(東亞)의 맹주다’하고 덤비던 일본제국 착취정부도 말이 신국을 절규하며 또 우리 동포들은 40년 동안 소위 황국신민화라는 미명 아래 기회마다 숭배치 않으면 안 된다고 참배 요배(遙拜)를 시키던 식민지에 대한 기만정책의 본영인 부산 용두산 신사가 지난 17일 오후 원인불명의 화재로 소멸하였다. 물론 해방된 그날부터 시민이면 누구 없이 용두산 신사의 처분문제에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던 차에 이러한 사건이 생겼으므로 아까운 생각은 없을 것이다. 소방서에 이 화재원인을 물은 즉 아직 확실치 않다고 하나 방화의 의심이 많다고 하며 항간에는 일인의 모략방화라는 소리도 높다. 만약 일인의 방화라면 과거에 있어서 소위 신부라고 숭배하던 신사를 왜 태워버렸는지 그 심리를 모르나 여하간 악괴의 본성을 폭로한 것이다.”
용두산 신사는 가장 역사가 오랜 신사일뿐 아니라 부산지방의 대표적인 신사였다. 일본인들이 부산에 상주하게 되면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금도비라신(金刀比羅神)을 모신 사당을 부산진에 지었는데, 1678년 왜관을 용두산 기슭으로 옮기면서 쓰시마 번주(宗義眞)가 금도비라신사(金刀比羅神社)를 건립하였다. 이 신사가 1894년에는 거류지 신사로 개칭되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이 신사가 초라하여 부산거류 일본인들이 거액을 모금하여 신사재건사업을 전개하여 1899년 준공하고 그해 7월 8일에는 신사 천궁식(遷宮式)을 거행하였다. 1900년에는 이 신사가 용두산 신사로 개칭되었다. 近藤喜博, 海外神社の史的硏究(11943), 47-8.
이 용두산 신사는 항해의 안전을 지켜 준다하여 뱃사람이 많이 신봉했던 금도비라신을 비롯하여 주길대신(住吉大神), 관원대신(官原大神), 천조황대신(天照皇大神) 등 여러 신들을 모시는 사당이었다. 1910년 당시 우리나라에는 31개의 신사(神社) 혹은 신사(神祠)가 있었는데 용두산 신사는 으뜸이었다. 1915년에는 용두산 신사는 새로운 건물인 신락전(神樂殿)을 건립하였고, 1916년 10월 15일 용두산 공원 조성을 계기로 용두산 신사는 일제의 현존과 일본적 종교의 중요한 거점이자 부산의 명소로 소개되기 시작한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8월 “신사는 국가의 종사(宗祀)로서 존엄한 우리 국체의 성립, 찬란한 역사의 발자취와 표리일체를 이룬다. 경신(敬神)의 참뜻을 명징하여 이 도(道)의 융성을 꾀하고자 하는 것은 국민사상의 함양에 절대 필요한 일”이라고 하여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을 공포하고 신사의 건립을 장려하는 한편 신사참배를 강제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1917년 3월 조선총독부는 ‘신사에 관한 건’을 발표하여,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이 참배할 수 있도록 신불을 봉사하는 곳”을 신사(神祠)라 하여, 신사(神社)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작은 사당이라도 신사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 설치를 장려하였던 것이다. 이런 조치에 따라 3·1독립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당시에는 신사(神社)가 36개, 신사(神祠)가 41개, 조선에서의 신사제도의 총본산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설립되던 1925년에는 신사(神社) 42개, 신사(神祠)가 108개에 달했다. 1925년부터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려는 의지가 드러나기 시작하지만 구체적으로 강요된 것은 1935년 이후였다. 앞서 인용한 “경신(敬神)의 본의에 철저하다”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신사참배를 의미했고, 그것은 국가제사 혹은 국민의례로서 어떠한 종교 신앙과도 배치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특히 1935년 4월 정무총감(今井田淸德)은 도지사 회의석상에서, “신을 경배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것이 우리가 나라를 세운 도의 요체이고, 국민도덕의 연원임에 비추어 이를 명징하고 선양함으로서 날로 국민정신의 진작, 경장을 도모할 것이다”고 훈시하고, “신사에 참배하여 경건한 기(氣)를 갖고 감사하는 것이 품성도야에 알게 모르게 심대한 영향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라고 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할 것임을 보다 분명히 했다. 1936년 8월에는 신사제도개정에 관한 5건의 칙령이 발표되었다.
이 때 경성신사와 함께 용두산 신사가 국폐사(國幣社)로 격상되었다. 국폐사란 조선총독부가 관리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신사였다. 곧 이어 대구신사(1937), 평양신사(1937), 광주신사(1941), 강원신사(1941), 함흥신사(1944), 전주신사(1944)가 국폐사로 격이 정해졌고, 조선신궁을 보좌하는 관폐대사로서 1939년 부여신사를 창립했다. 정리하면, 이세(伊勢)신궁에 직접 봉사하는 조선신궁과 이를 보좌하는 관폐대사로서 부여신궁을 두고, 그 아래 용두산 신사 등 국폐사로 격이 정해진 신사를 두고, 그 다음에 거류민설치 신사를, 맨 밑에는 민중과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신사(神祠)를 두어 신사제도의 계층제가 확립되었다. 이렇게 볼 때 용두산 신사는 신사제도에 있어서도 중요한 곳이었고, 신사참배가 강요된 1935년 이후 부산지방에서의 참배의 중요 거점이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신사는 한국인들의 정신과 영혼을 짓밟는 귀신들의 전당이었고, 기독교인들의 원부(怨府)였던 것이다.
따라서 해방과 함께 일본종교의 거점이었던 신사는 불타거나 파괴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의 경우, 일제의 패망이 확실해 지자 조선총독부가 신궁의 본전(本殿)까지 스스로 소각하고 파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한국인들에 의해 불탔다. 해방 후 8일 만에 전국 136개 처의 일본 신사가 불태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의 용두산 신사는 해방되고 3개월이 지나도록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1945년 11월 17일, 부산 앞바다의 세찬 바람이 귓전을 스치는 음산한 저녁 무렵, 용두산 신사에 불이 붙기 시작하고 불길은 삽시간에 이것 저곳으로 진화되었다.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의 억지 절까지 받아먹어 화력(火力)이 세다고 생각했다.
용두산 신사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도리이(鳥居)라고 불리는 ‘ㅠ‘자 모양의 입구가 있었다. 도리이는 일본 지도에서 신사를 가리키는 표지이기도 하다. 도리이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석등(石燈)이 늘어져 있고 그 길을 따라 좀더 들어가면 한 쌍의 사자상이 있는데, 흔히 해태상이라고 말하지만 일본말로는 ‘고마이누’라고 한다. 이것은 해태상과 마찬가지로 악귀를 막는 수호상이었다.
신사 건물 앞쪽 한 귀퉁이에는 약수터같이 보이는 곳이 있는데 데미즈야(手水舍)라고 부른다. 신 앞에 나아가기 전에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한다는 의미로 손을 씻는 곳이다. 이런 정화의식을 ‘하라이’라고 부른다. 이런 석상 뒤에 있는 것이 배전(拜殿)이다. 이곳이 참배자들이 두 번 절하고 두 번 손벽을 치는 곳이다. 그 뒤에 신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본전(本殿)이 있다. 본전을 신전(神殿), 혹은 정전(正殿)이라고 부른다. 본전에는 제신과 제신을 상징하는 예배 대상물 곧 신체(神體)가 모셔져 있어 일반 참배자의 출입이 금지된다. 현재 부산탑이 위치한 곳이 본전이 서 있던 곳이었다.
경내에는 소나무(神木)들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새끼줄에 흰 종이오리를 여러 갈래로 드리운 일종의 금줄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이런 금줄을 ‘시메나와’라고 하는데, 신선(神仙)지역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이날 화제는 배전에서 시작되어 본전과 경내로 확산되었다. 비록 신사가 불탔으나 민주중보의 기사처럼 그 누구도 이를 애석하게 여기지 않았다.
문제는 어떻게 이 신사가 불탔을까? 방화의 혐의가 짙다고 보았지만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혹자는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 불을 질렀다고 말했을 만큼 신비로운 것이었다. 필자는 여러 사람들을 통해 용두산 신사가 전소된 것은 분명 하나님이 하신 일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은 바 있다.
용두산 신사의 파괴는 방화에 의한 것이고, 방화자는 청년 집사 민영석(閔泳石, 1909-)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3년 6월 26일 주일이었다. 부산 대연동의 새순교회 예배 인도 차 갔다가 이 사실을 방화자 본인의 증언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1945년 당시 36세의 사상교회 집사였던 민영석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유린했던 신사가 버젓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의분을 감추지 못하고 방화를 결심했고, 이를 다른 이와 결행하면 비밀이 누설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단독으로 방화하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일제하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두 번이나 투옥되었던 그는 직장을 잃었고, 해방 후에는 이승원 전도사의 제매인 김채민씨가 경영하는 가방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민영석은 가방공장에서 사용하는 염색용 물감을 회석할 때 사용하는 신나 두되들이를 병에 담아 신문지로 숨긴 후 용두산 공원으로 올라갔다.
인적이 드믄 틈을 타서 도리이를 지나 계단을 올라 배전으로 갔고, 이곳저곳에 숨겨온 신나를 뿌렸다. 그리고는 불을 붙였다. 불을 붙인 뒤 민영석은 신속히 그곳을 빠져 나왔다. 마침 해풍이 불어 불길은 삽시간에 이곳저곳으로 확산되었다.
이 때의 방화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민영석은 오직 두 사람의 근친한 친구에게 알렸는데, 그 한 사람이 이승원 전도사(후일 목사가 됨)였고, 다른 사람이 사상교회 방문수 집사(후일 장로가 됨)였다. 후에 민영석은 고려신학교에서 수학하고 1951년 6월 제5회로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함양중앙교회, 병곡교회, 대남교회, 합천가야성산교회, 안의교회, 함안 영생교회, 의령덕실교회, 진주 금산교회 등 서부경남지방에서 목회를 마감하고 은퇴하였다. 그리고는 장남 민상식 집사(현 장로)와 함께 새순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필자가 민영석 목사를 만났을 때가 바로 이 때였다.
민영석 목사님은 역사를 공부하는 필자에게 용두산 신사 방화 사실을 공개했던 것이다. 꼭 13년 전의 일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듣고 후일에 공개하리라 마음먹고 오늘까지 지내왔다. 그러나 이제는 주변의 여러 분들도 알게 되었고, 지난 9월 2일 민영석 목사님은 필자가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부산경남교회사연구회에서 공개적으로 이 사실을 증언하였다. 이제 용두산 신사의 방화는 더 이상 은밀한 사건이 아니다. 50여년의 세월 덕분에 민영석은 건조물 방화범에서 자유하게 되었다. 도리어 그것은 의로운 결행이었다. 그는 신나를 뿌리면서 인명 피해가 없기를 기도했다는데, 다행히 단 한 사람의 인명피해도 없었던 점을 그는 감사하고 있다.
현재 민영석 목사는 97세의 나이로 장남인 민상식 장로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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