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주년을 맞이하는 3.1절 기획】3.1운동의 주도적 역할한 기독교

3.1운동의 주역이 된 신앙의 선배들 정신 이어야
우리나라는 올해로 제87주년 3ㆍ1절 기념식을 가지게 된다. 이는 국가적인 기념일이기도 하지만 한국교회가 신앙의 자유와 민족의식을 지키기 위해 독립운동을 펼친 기념적인 날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중심에는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서를 주도한 33인의 대표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다.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도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절망을 모르는 민족으로 살아남게 한 힘이 바로 한국교회 안에 있었던 것이다. 3ㆍ1운동은 교회의 역량이 가시적으로 나타난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에 참여했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중 절반이 기독교인
3·1운동은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서’가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됨으로써 점화되었다. 그들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6명이 기독교계 인사였다. 이는 한국 기독교가 삼일운동의 준비단계와 그 전개과정에서 막중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당일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을 비롯해 평양, 선천, 원산, 의주등 12곳에서, 모두 교회 내지는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독립만세운동’은 3월4일 경이 되자 전국적인 운동으로 파급되어 3·1운동이 민중화되었다. 당시 천도교측에서 기독교측이 참여하지 않으면 거족적 독립운동이 되기 어렵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 기독교는 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적 역량을 비축하고 있던 세력이었다.
외적으로 3·1운동은 1917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의 선언에 고무되어 준비되었다. 고종 황제의 장례일(3월 3일) 전날을 기해 독립선언을 하기로 계획하였으나, 그 날이 주일이었기에 기독교계의 요청으로 하루 앞당겨 3월 1일(토)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전국적인 만세운동과 가두행진을 한 것이다.
당시의 목회자들은 삼일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민족의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설교하였다. 자연히 삼일운동으로 인해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것도 교회와 기독교신자들이었다.
사천교회 송현근 목사와 130여명 교인 만세운동
강서사건은 3ㆍ1운동의 최대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제의 폭력에 항거하여 실력대결을 벌였던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 강서사건으로 사망자가 63명, 중상자가 20여명이 발생할 정도로 매우 격렬한 항쟁이었다. 3월 3일 강서군 소재의 사천교회(沙川敎會)의 송현근 목사는 130여명의 교인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현장에서 1사람이 즉사하고, 주동자 8명이 체포되었다. 이 일을 목격한 군중들은 격앙되기 시작했다. 이에 다음날 군중들은 인접지역의 원장(院場) 장날에 모였다. 그리고 이 날을 이용하여 원장교회 장로 차병규, 지석용, 임이걸 등이 주도한 만세운동에 합세했다.
그러자 시위대는 3,000여명으로 급속히 불어났다. 이에 시위대는 30세 이하의 결사대 40여명을 앞세우고 사천 헌병대로 행진하며 만세를 부르고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일제 군경이 시위대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쓰러진 동료의 시체를 넘고 넘으면서 발사하는 군경에게 대항했다.
그리고 사격을 가하던 군경 3명을 쓰러뜨리고 만세를 높이 불렀다. 이는 3·1운동이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되었지만 일제가 군경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폭력적 항거로 전환되는 사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실 3·1운동에 뒤따른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보복은 매우 가혹했다. 수많은 일제의 관리들이 교회당의 종탑을 파괴하고, 유리창은 한 장도 남겨놓지 않았으며, 모든 성경과 찬송가 그리고 교회학교의 명부와 교회의 서류들을 파괴했다. 심지어 교회 직원들을 체포하고 옷을 벗긴 후 교회당 뜰에서 온갖 모욕을 주거나 구타하기가 일수였다.

제암리교회에서 교인들을 태워죽인 사건
화성 ‘제암리교회사건’은 3·1운동 당시 일제에 저질러진 최대의 만행사건의 하나였다. 이 사건은 만세시위가 막바지에 이른 그해 4월 15일 오후 2시경에 일어났다. 일단의 군인들이 제암리로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전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30여명의 교인들을 총칼로 위협하여 제암리교회에 집합시켰다. 이어 교인들의 손을 꽁꽁 묶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근 후 예배당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총격을 가하여 사살하였다. 벌건 대낮에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외신에 보도된 ‘서울의 십자가 학살사건’
외신으로 보도되었던 ‘서울의 십자가 학살사건’도 유명한 사건이다. 3월 9일 서울에서 일본군은 다수의 기독교인들을 체포하여 교회로 끌고 갔다. 그리고 십자가에 묶고는 “너희들은 기독교인이니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소원일 것이다”하면서 총검을 찔러 죽이는 잔인한 살상을 저질렀다.
이런 사건들은 단순히 교회나 몇몇 기독교인에 대한 학살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즉 이는 민족의 독립의지를 거족적인 항일운동으로 승화시켰던 교회에 대한 보복성 분풀이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허호익 교수(대전신대)는 “삼일운동이 일어난 후 6개월 동안 체포된 19,525명 중 기독교인이 17.6%이었고, 당시 한국의 인구가 2,000만명으로 기독교인의 수가 그 1%인 20만 명이었다는 점에서 일반국민 보다 18배 정도 많이 체포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이는 전체운동의 20% 이상의 역량을 기독교에서 발휘할 정도로, 한국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바친 민족적 정열과 항일투쟁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물론 3·1운동은 분명 종교적 운동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참여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민족독립운동에 행동으로 뛰어들었다. 단지 일제 하에서 정당한 자치권의 확보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사생결단, 우리의 독립’이었으며, ‘조선은 언제든지 조선 사람의 조선이 되게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그해 5월 까지 파괴된 교회의 수와 체포된 교역자의 수로 보아도 기독교의 피해가 가장 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오는 3월1일 국가에서는 삼일 만세운동의 재현과 기념식 등으로 그날의 외침을 기억하고자 한다. 교계에서도 87년 전 그날 신앙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불렀던 만세의 물결을 되뇌이어,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순수한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신앙의 선배들의 정신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손진화, 박근태 기자

2006.02.16
지난 기사를 보실려면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

110년 전, 항구 서쪽에 복음으로 세워진 부산 항서교회



-암울했던 시대에 복음의 빛으로 세워진 교회
-한국전쟁, 피난민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
-‘학사교회’라고 불리던 교회
-지역사회를 품고 다음 세대와 함께 할 ....

 

2015 예수부활 부산연합축제 준비위원장 이성구 목사



Q 기존 ‘부활절연합예배’라는 이름에서 ‘예수부활 부산연합축제’라는 이름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A 기독교 최대 명절은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

 

삼일교회 성도가 공개한 송태근 목사 청빙 일화 ‘주목’

▲송태근 목사가 삼일교회 청빙을 받아 부임하던 시기, 강남교회가 보여준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 새삼 누리꾼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사진 삼일교회)


삼일교회를 다니는 한 성도가 3년 전 송태근 담임목사의 청빙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소개해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시기 강남교회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