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크루즈 성지순례
2000년 전 지중해 세계를 누빈 바울의 발자취를 따르는 여행길
‘크리스탈’ 호, 2만 6천 톤에 이르는 거대한 여객선 타고 지중해 누벼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Steps of Paul)
1980년대 초,‘<사랑의 유람선(The Love Boat)>’이라는 제목의 미국 드라마가 한국에서 방영된 적이 있다. 미국 서해안을 오가는 대형 여객선 ‘퍼시픽 프린세스(Pacific Princess)’호를 무대로 하는 이 코믹 드라마는, ‘먹고 살 만한’ 미국 사람들의 소소한 고민과 갈등들이 며칠간의 선상 생활을 통해 극적으로 풀리는 것을 기본 설정으로 하고 있다. 당시 그 드라마를 보면서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 미국 사람들에게도 고민이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지만, 그게 며칠 동안의 선상생활을 통해서 풀린다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드라마에 비춰진 ‘선상 생활’이라는 것이 도무지 세상의 고민이나 갈등 같은 것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부신 하얀 선체에 푸른 바다, 갈매기는 날고 칵테일은 달고, 은성한 선상 파티에 낭만적인 달빛 댄스까지. 80년대 초 우리 텔레비전을 통해서 지켜본 유람선의 모습은 오히려 어린 시절 동화책 속의 마법의 성과 닮아 있었다. 알고 보니 그런 식의 선상 여행을 ‘크루즈(cruise)’라고 한단다.
지난 4월 1일 그리스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에서 크루즈 여행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CBS 투어가 마련한 ‘크루즈 성지순례’ 프로그램이다. 이 역사적인 크루즈 성지순례는 그 이름부터 상쾌한 ‘크리스탈(Cristal)’ 호와 함께 한다. 2007년에 새롭게 단장한 이 2만 6천 톤에 이르는 거대한 여객선은 1,300여 명의 승객을 태우고 지중해를 누빈다. 넓이 25미터, 길이 162미터. 물 위에 떠 있는 10층 높이의 특급 호텔이다. 배에는 없는 게 없다. 극장과 헬스클럽과 수영장과 사우나, 그리고 카지노와 사진관과 미용실과 면세점까지. 특급 호텔의 모든 시설과 서비스, 거기다 지중해의 바다와 하늘을 (아주 커다란) 덤으로 얹은 셈이다. 없는 것이라고는 도시의 소음과 부산함 정도가 아닐까. 그래서 크루즈는 조용하고, 여유 있고, 한적하다. 크루즈 여행은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선상 생활과 기항지 관광, 다시 말해서 ‘배에 타고 있을 때’와 ‘배에서 내렸을 때’의 구분이다. 배에 타고 있을 때는 즐기면 된다. 다양한 공연, 파티, 집회, 예배의 스케줄이 매일 매일 새롭게 진행된다.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히 묵상할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다. 이도 저도 싫으면 선글라스와 책 한 권을 챙겨서 선 데크(sun deck)에 누워버리면 그만이다. 고개를 들면 지중해, 눈을 감으면 평화다. 그래도 배는 순항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새로운 항구에 닻을 내린다.
크루즈 여행은 어쩌면 성지순례를 위해 고안된 여행 방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예수와 사도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지역은 모두 지중해 연안과 지중해의 섬들이며, 그것은 당시 ‘세계의 중심’이 지중해였다는 면에서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지중해는 크루즈 여행이 가장 발달한 해역이며 주요 기항지의 상당수가 직·간접적으로 기독교의 기원과 연결되어 있다. 특히 지중해의 동부에 집중되어 있는 사도 바울의 발자취는 바다를 통하지 않고는 만날 수 없다. 그래서 로도스, 린도스, 키프로스, 안탈리아, 타르수스 등을 순례하는 이 크루즈 성지순례의 타이틀은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Steps of Paul)’이다. 아테네 피레우스 항을 떠난 배는 그리스의 섬들과 터키 남부를 거쳐 이스라엘, 키프로스, 산토리니를 돌아 아테네로 귀환하게 된다. 동부 지중해 ‘시계 방향 순항’ 일정인 셈이다. 저녁 6시 피레우스 항의 불빛은 멀어지고 별빛은 가까워진다. 저녁으로는 그린 아스파라거스 그라탱과 허브 크림 스프, 그리고 비프 스트로가노프를 먹었다. 후식은 체리 소스와 아몬드로 장식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다. 내일은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서 아침을 맞는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의 사랑과 눈물을 따라서
“크루즈 여행에서 제일 좋은 점은?”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짐 쌀 필요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배에 한 번 타면 그 뿐 여행이 다 끝날 때까지 짐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열흘 가까이 짐 걱정을 하지 않고 여행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황홀한 경험인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잘 모를 거다. 크루즈 성지순례는 그렇게 이미 2천 년 전에 짐 걱정 없이 지중해 세계를 누빈 두 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여행이다. 사도 바울은 터키 다소에서 태어나 중·근동과 그리스 이탈리아 등지로 전도여행을 다녔으며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카이로와 나사렛, 갈릴리 지방을 거쳐 결국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오른다. 비행기도, 크루즈도 없던 그 까마득한 시절에 그 분들이 방문한 지역을 지도 위에서 살펴보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순례는 어쩌면, 그런 물음에 대해 순례자 스스로 묵상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지도 모른다. 배는 터키 안탈리아를 거쳐 메르신으로 달린다. 페르게(Perge)와 아스펜도스에서 느껴지는 역사의 무게, ‘돌 문화’의 아름다움. 다소의 사도 바울 생가 터 깊은 우물에서 길어올린 차가운 물 한 두레박, 안디옥 성 베드로 암굴 교회의 서늘한 경건함... 터어키에서 만나는 사도 바울의 성지들은 감각으로 먼저 다가온다. 문자로 추상화된 말씀을 현장에서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에 순례는 의미를 갖는 게 아닐까.
그리스와 터키를 거쳐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이 여정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길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지 저편, 그리스와 지중해 너머 저 멀리 한반도에서 날아온 여행객들은 사도 바울의 고향을 지나 마침내 이스라엘에 도착한다. 바울은 얼마나 예수를 만나고 싶어 했을까. 2천년의 세월을 넘어 사도 바울이 전도했던 그 땅을 지나, 이제 그가 그토록 진심과 목숨을 바쳐 전했던 그 말씀의 주인공 예수를 만난다. 배는 이스라엘 하이파 항에 도착했다. 팔복교회와 가버나움, 아름다운 갈릴리 해, 혼인잔치의 가나, 나사렛과 요단강을 거쳐 예루살렘까지, 여행자들은 이틀에 걸쳐 이 황량한 이스라엘 땅에서 예수의 자취를 쫓는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순례자가 보는 것은 황량함을 넘어선 사랑과 눈물이다. 그렇게 순례객들은 감동 속에 하이파를 떠나, ‘크루즈의 절정’이라는 산토리니를 향한다. 바다는 잔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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